노인숙 여사가 백선엽 장군 사진집 <군인 백선엽>을 펼치며 대구 야전병원 위문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오동룡

초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5월 마지막 날, 경기 용인의 시니어타운에서 만난 노인숙(盧仁淑) 여사는 평양 사투리가 묻어나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어서 오시라”며 기자를 반겼다. 기자가 “꼿꼿하시다”고 인사를 건네자, “음식 맛이 떨어져 식사를 잘 못 하지만, 다행히 크게 불편한 곳은 없다”고 했다.

“날씨가 더워지니 고향 평양의 음식, 냉면이 생각나시겠다”고 하자 “남편이 대만 대사로 계실 때, 찬 음식을 너무 많이 먹다 보니 그때 장이 고장 났다”면서 “그 이후로 여름철에 냉면을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1925년생, 올해로 99세인 노인숙 여사는 바람이 불면 쓰러질 것 같은 가냘픈 몸매였다. 이 여인이 ‘6·25 전쟁영웅’ 백선엽(白善燁·1920~2020년) 예비역 육군 대장이란 ‘한국군 현대화의 아버지’를 80여 년간 내조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노 여사의 입을 통해 나오는 6·25 전쟁을 들으면서 그것이 기우(杞憂)임을 깨닫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953년 무렵 이승만 대통령이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의 모친 방효열 여사(왼쪽 세 번째)의 환갑을 맞아 방 여사 가족을 경무대로 초대, 금시계를 선물로 주었다. 왼쪽부터 백인엽 장군, 백선엽 장군, 방 여사, 프란체스카 여사, 이 대통령, 변영태 국무총리, 이호 국방부차관. 사진=백선엽

“흰색 셔츠 차림으로 꿈에 나타나”

— 7월 10일이면 백선엽 장군님이 향년 100세로 돌아가신 지 4주기를 맞습니다만.

“꿈에도 자주 나타나시고…, 돌아가셨다는 게 아직 실감이 안 나요. 정말 옆에 계신 것만 같아요. 얼마 전까지 군복 차림이 아니라 하얀 셔츠를 입고 나타나셨어요. 편안한 표정으로 나타나니까 좋은 곳에 가셨나 보다 생각이 들어요.”

— 무슨 말씀이라도 하시던가요.

“그냥 말없이 쳐다보기만 해요.”

— 백 장군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전대협·나라지킴이운동본부 등 시민단체연합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광화문 광장 앞에 ‘백선엽 장군 국민장 시민 분향소’를 열어 백 장군님을 추모했습니다.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던 일 아니에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닷새 동안 시민분향소와 빈소를 찾아주신 수많은 국민들께 고맙다는 마음을 전했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 챙기지 못한 것이 죄송하고 후회스러워요.”

— 특히 주한 외교사절들과 미군 장성들이 영결식 때 대규모로 애도를 표했는데, 인상적이었습니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 로버트 에이브럼스 주한미군 사령관이 빈소를 찾아주셨고요. 월터 샤프, 존 틸럴리, 빈센트 브룩스 같은 역대 한미연합사령관들도 영결식 때 추모 메시지를 보내주셨어요. 에이브럼스 사령관이 남편을 ‘영웅이자 국가의 보물’이라고 애도한 것이 기억에 남아요. 지금도 추석이나 설날 때 에이브럼스 사령관이나 역대 미 8군사령관들이 카드와 선물을 보내줍니다.”


“난리 통에 집안 지킨 것밖에 더 있겠어요?”

— 백선엽 장군님은 당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파묘(破墓) 법안을 발의하는 등 대전현충원에 안장하는 문제마저 논란거리가 될 정도로 홀대를 받았습니다. 실제 장군님께서 묻히길 원하신 곳은 어디였나요.

“이명박(李明博) 대통령 때 동작동 국립묘지 안장이 검토되긴 했지만, 우리는 동작동에 연연하지 않았어요. ‘전우들이 묻힌 곳이라면 그 어느 곳이든지 같이 잠들고 싶다’는 게 남편의 소원인데, ‘동작동(국립서울현충원)이면 어떻고 대전(국립대전현충원)이면 어떠냐’는 거지요. 지금 대전현충원 장군 2묘역에 편안하게 잠들어 계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자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노인숙 여사는 가톨릭 신자다. 세례명은 ‘젬마’(이탈리아의 성녀 젬마 갈가니)라고 했다.

— 장군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사모님께 남기신 말씀이 있나요? ‘그동안 나랑 사느라 고생했다’ 같은….

“전혀요. 남편은 마음엔 있어도 도무지 표현을 안 했어요. 한평생 사는 동안 저한테 대놓고 얘기한 거는 서너 번 될까 말까 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이들 앞에선 ‘너희 어머니 공로가 많다’고 말하곤 하셨어요.”

— 사모님께 직접 말씀하신 것보다 더 진정성 있게 들리는데요?

“뭐, 제가 도와드린 건 하나도 없고요. 난리 통에 집안을 지킨 것, 그거밖에 더 있겠어요?”


평양 메리야스 공장의 장녀로 출생

노인숙 여사의 친정아버지 노용수(盧龍洙) 선생은 자수성가(自手成家)한 사업가였다.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평양에서 메리야스 공장을 경영했고, 1950년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 메리야스를 생산하는 대창메리야스 직조공장을 차렸다. 노 여사의 삼촌 노용성은 평양광성고등보통학교를 나와 평양부 서문통에서 제생당 약방을 운영했다. 6·25 전쟁이 발발하고 노 여사가 아버지의 신당동 집에 머물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의 그런 마련 때문이다.

친정어머니 이정석(李正錫) 여사는 6남매(딸 둘, 아들 넷) 가운데 노 여사를 장녀로 낳았다. 노 여사가 9세 때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노 여사의 외갓집은 평양에서 광산(鑛山)을 소유하고 있어 형편이 넉넉한 편이었다. 노 여사의 외할머니는 16남매를 낳았는데, 노 여사의 모친이 장녀 노릇을 하며 일본으로 유학 간 동생들을 대신해 외할머니를 수발하다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다고 한다. 노 여사의 모친이 건강 악화로 요절(夭折)하자 외할머니는 “내 팔자에 어떻게 그런 효녀가 태어나겠느냐”며 통곡했다고 한다.

— 백 장군님 모친인 방효열(方孝烈) 여사가 1925년 남편 백윤상(白潤相) 선생을 떠나보내고 삼 남매를 데리고 대동교에 가서 투신하려 했을 정도로 생활고(生活苦)를 겪으셨다는데, 사모님 친정은 유복하신 편이었군요.

“그런 셈이죠. 아버지가 절 그렇게 예뻐하셔서 만 7세도 되기 전에 가톨릭 계통의 성모소학교에 넣으셨대요. 그래서 동급생 가운데서도 제일 나이가 어렸어요. 소학교를 마치고는 아버지께서 서울로 유학을 보내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6년제 배화여중의 전신)에 입학시키셨죠.”


“조만식 비서실장 소개로 만나”

— 서울 생활은 어떠셨나요.

“기숙사 생활이었는데, 참 활기차고 재미있었어요. 금강제화 김동신(金東信) 전 명예회장(작고)의 부인 김영희(金永姬)씨가 가까운 후배였어요. 일정(日政) 때라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다녔는데, 해방 전에 졸업을 했어요. 피아노를 공부해 음대에 진학하고 싶었는데, 따로 피아노 레슨비를 내야 했어요. 남동생 노원부(盧元富, 서울대 미대 졸, 자양중 교장 역임)와 저한테 월사금(月謝金) 보내주시는 아버지께 추가 부담을 드리기 싫어 주저하다 졸업하면서 평양으로 돌아왔지요. 그 직후에 평양에서 교회 유치원 일도 도와주고, 학교 선생으로 오라는 제의도 받았어요.”

— 왜 학교 선생님으로 가지 않으셨어요?

“당시 여성들은 학교를 마치고 얌전히 있어야 좋은 혼처(婚處) 자리가 났지, 사회활동을 하면 시집을 못 갔어요. 처음 이야기하는 거지만, 아버지 몰래 평양교구의 관우리성당 신부님께 취직을 부탁드렸더니 조그마한 사무실에 소개해 주셨어요. 그런데 그곳에 출근하고 일주일도 못 돼 이 사람하고 선을 보게 됐어요. 일껏 소개시켜주신 직장에 나가지도 못하게 되니까 신부님께 어찌나 미안하던지…. 1944년 가을 무렵, 덜컥 이 사람을 만나니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너무 일찍 시집을 갔죠.”

— 누구 소개로 만나셨어요?

“시어머니 언니의 아들, 그러니까 시아주버니 송호경(宋昊經)씨가 우연히 우리 집에 보험 가입 권유차 왔다가 저를 시댁에 소개했던 거예요. 그분은 조만식(曺晩植·1882~?) 선생의 비서실장을 지냈고, 남편을 조만식 선생에게 소개해 비서실(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에 근무하게 해주었어요. 1945년 10월 소련군 지도로 창설한 적위대(赤衛隊)가 시동생 백인엽(白仁燁)이 맡고 있던 경호대(警護隊)를 해산할 때까지 시동생은 고당 선생을 경호했던 거지요. 이남에 내려와서도 고당 선생 가족과 가까이 지냈는데, 고당의 막내 따님 조선영(趙善英)은 남편의 《군과 나》 출판기념회에도 왔을 정도로 친밀했어요.”

휴전 무렵,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의 지프 앞에 서 있는 노인숙 여사. 사진=백선엽


“사진 보니 너무 무섭게 생겼더라”

— 장군님과 처음 만난 곳을 기억하세요?

“친정집에서 만났지요.”

— 시댁에서 만나신 게 아니고요?

“시어머니는 시누이(백복엽)와 함께 살고 계셔서,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친정집으로 한 거지요. 친정 부모님은 남편의 가정 상황을 자세히 모르셨던 것 같아요. 평양사범을 졸업하고 만주군관학교를 나온 엘리트 청년으로만 생각하신 것 같아. 참 안 된 이야기지만, 친정아버지야 ‘군인’이란 튼튼한 직업을 가진 청년의 됨됨이만 보고 결혼을 승낙할 수 있겠지만, 친정어머니는 다르지 않겠어요?”

— 백 장군님은 자서전 《군과 나》에서도 스스로 ‘강한 눈’을 갖고 있어 부하들이 항명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모님 보시기에 장군님 인상은 어땠나요.

“그 사람을 만나기 전, 시댁에서 군복 입은 사진을 보내왔는데, 너무 무섭게 생겼어요. 6·25 전쟁 기간 중에 다부동 전투를 끝내고 북진 중에 대구 동촌비행장에서 철모 쓰고 팔짱 낀 사진이 있어요. 꼭 그 인상이었어요. (기자가 ‘예쁘장하게 나오신 것 같다’고 하자) 얼굴은 작고 눈이 날카롭잖아요?”

기자가 백 장군의 동촌비행장 사진을 노 여사에게 가리키며 “이 사진은 대구 동촌비행장에서 사색에 잠긴 백 장군님을 마거릿 히긴스라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 기자가 팔짱을 껴보라 하고 찍어준 것”이라며 “전쟁 중에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장군님에게 다가와 사진을 찍어주면 질투 안 나시냐”고 했더니 “내가 남편 관리를 했어야 했나”라며 웃었다.


결혼식 사흘 뒤 만주행

백선엽 장군은 1939년 평양사범을 졸업하고 1940년에 만주군관학교에 입교했다. 1941년 12월에 제9기생으로 졸업했는데, 그가 졸업한 시기는 이른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시기였다. 그는 ‘견습사관(見習士官)’으로 동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군 보병 제28단(연대급) 자무쓰(佳木斯)에서 1년간 복무했다. 이어 소위로 진급해 1943년에는 함경북도와 접하는 간도성, 즉 현재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던 간도특설대(間島特設隊)로 전임됐다. 이 시기에 평양에 휴가를 나와 노인숙 여사와 ‘맞선’을 보았던 것이다.

— 장군님과 처음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누셨어요? 선보고 바로 청혼(請婚)이 들어왔나요?

“글쎄, 뭐라고 얘기를 나눴는지 기억이 안 나요. 선을 보고 사흘 만에 청혼이 들어왔고요, 일주일 만에 혼례를 올렸지요. 큰어머니가 연지 곤지 찍고, 족두리를 씌워 나를 시누이댁으로 데려갔어요. 식장엔 시어머니, 중매 선 시아주버니, 친정 부모님, 큰어머니가 참석하셨어요. 우린 결혼식 사진도 없어요.”

— 평양인데 사진관이 없을 리가요.

“물론 있지요. 그런데 남편은 휴가 나온 틈을 타 결혼식을 서둘러 올리는 바람에 경황이 없었던 같아요. 사전에 준비 없이 숨 가쁘게 진행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으실 거예요. 우리 부부는 결혼사진도 없는 데다가 약혼반지도 결혼반지도 없다니까요. 당시 남편은 반지 살 돈도 없었던 모양이에요.”

— 기가 막히셨겠습니다.

“더 기막힌 건… 혼례를 올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만주로 떠나는 열차를 탔습니다. 시누이댁에서 사흘 밤을 자고 만주로 간 거지요. 새색시가 산 설고 물 설은 만주 땅으로 신랑 하나 의지해 떠나는데, 평양역에 배웅 나온 친정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식구들도 전부 눈물을 흘렸어요. 저도 만주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울면서 갔어요. 울다 보니 그 사람이 ‘목적지인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 다 왔다’며 내리자고 해요.”


“남편, 배고픈 건 못 참아”

— 그곳에서 관사까지 멀었습니까.

“아마 1시간 이상을 정처 없이 걸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 기차역에 병사 하나가 마중을 나와 내 가방을 들어주었어요. 관사는 군부대 밖에 있는 6조 다다미가 깔린 방 2개짜리 단독주택이었어요. 마당은 꽤 넓었어요. 오밤중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피로가 몰려와 그대로 잠이 들었어요.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부엌에 가보니 먹을 게 하나도 없는 거라. 쌀 조금, 군인들이 패놓은 장작…. 그것밖에 눈에 띄지 않았어요. 부엌에 커다란 솥이 하나 달려 있었는데, 밥을 해야 한다니 기가 막히더라고요. 부엌 근처에는 가보지도 않고 살았는데…. 남편에게 밥은 해 먹여야 하니, 무조건 해보자고 덤벼들었어요. 그런데 솥이 커서 물을 맞출 수가 있나요. 솥이 달아오르니까 밥이 금세 새카맣게 탔어요.”

— 아이고, 두 분이 난감하셨겠네요. 백 장군님이 밥을 태우니 뭐라 하시던가요.

“신혼인데도 화를 내더라고요. 특히 남편은 배고픈 건 못 참으세요. 어느 집에 가서 얻어먹었는지, 아무튼 한 끼 얻어먹고 온 기억이 나요.”

— 만주 생활 신고식을 톡톡히 치른 셈이군요.

“신혼생활이 아니라 고생문이 훤하게 열린 거죠. 우리가 돈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그때는 배급 시대라 돈을 만져본 기억은 안 나요. 피복, 쌀, 부식을 전부 배급받았어요. 부식 중에 튀긴 크로켓도 있었어요. 된장·고추장도 없고, 김치 담글 배추도 없어서 김치도 못 담가 먹고 살았죠. 그곳에서 해방 때까지 1년 남짓 사는 동안 어떻게 먹고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소련군 통역사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라”

— 당시 백 장군님 부대는 만리장성 부근 열하성(熱河省)과 북경 부근에서 마오쩌둥(毛澤東)의 팔로군(八路軍)과 전투를 치르기도 하셨다는데, 무섭지 않으셨나요.

“우리가 살았던 그곳은 전쟁터가 아니에요. 안전한 곳이었어요. 그곳에서 1년 남짓 지내는 동안 총탄이 날아오고 포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제가 평양으로 나오려고 할 때 2~3주간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좀 불안한 마음은 있었어요. 연락할 수단도 없었고, 그때 마침 제가 말라리아를 앓아서 고생하던 때였어요.”

— 장군님은 부대에서 있었던 그날그날의 일들을 오사바사하게 얘기하는 타입은 아니시지요?

“보다시피 그렇지요. 입이 워낙 무거워서 그런지 일절 얘기를 안 해요. 만주 허허벌판에 집 서너 채 있는데, 싸늘한 다다미방에 호젓하니까 무서운 느낌마저 들었죠. 그래도 그곳에서 겨울을 나지 않고 여름에 나온 게 다행이에요.”

백선엽 중위는 1945년 8월 9일 소만 국경을 돌파해 만주의 중심부로 진격하는 소련군을 만나 명월구에서 무장해제를 당한다. 여기서 만난 소련군 한인(韓人) 통역사는 백선엽에게 “조선은 곧 독립된다. 당신은 여기 있으면 붙잡혀 시베리아에 유배된다.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귀띔했다. 백선엽은 부대를 해산하고 연길(延吉)과 용정(龍井)을 거쳐 두만강을 건너 무산(茂山)~백암(白巖)~길주(吉州)~함흥(咸興)~고원(高原)~양덕(陽德)을 지나 꼬박 한 달 걸려 평양으로 돌아왔다.


1950년 10월 19일 평양 입성 후 프랭크 밀번 제1군단장(소장)에게 평양 탈환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제1사단장 백선엽 장군. 사진=백선엽

“마지막 평양행 열차에 극적 탑승”

— 그때 백 장군님이 왜 사모님께 먼저 내려가라고 했나요.

“몇 주일을 집에 들어오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아침 일찍 나타나 ‘빨리 짐을 싸 고향으로 가야 한다’고 했어요. 나는 영문을 몰라 ‘왜 돌아가느냐’고 했더니 ‘어쨌든 가야 한다’고 해요. ‘같이 가느냐’고 하니까 ‘당신 혼자 가야 한다’고 해요. ‘나 혼자 가는 거면 안 가겠다고, 당신 안 가면 나도 가지 않겠다’고 하니까 ‘자기가 하라는 대로만 하라’는 거예요. 친정에서 해준 값나가는 옷감과 패물은 여자가 움직일 때 힘드니 자기가 가져다줄 거래요. 자기는 함경도로 나올 것이고, 당신은 봉천역(奉天驛)에서 평양행 열차를 타고 가래요.”

— 그때까지 사모님은 해방이 된다는 생각은 전혀 못 하셨군요?

“그렇지요. 남편은 봉천역까지 나를 태워주고 떠났고…. 봉천역에 일본 민간인들이 가득했어요. ‘이거 수상하다’고 느꼈죠. 그런데 그 사람들이 열차가 왔는데도 타지 않는 거예요. 아마 불안해서 다른 루트를 찾았던 것 같아요. 그때 제가 임신했었는데 간신히 운 좋게 열차에 올라탔어요. 그게 봉천역 마지막 열차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어요.”

— 장군님이 열차에 올라타시는 걸 보셨나요?

“아니요, 그 사람은 벌써 가버렸지요. 열차를 타니 화장실에 갈 틈도 없이 콩나물시루였어요. 다행히 앉아서 왔는데, 의주(義州)에 오니 역 구내(構內)에서 ‘만세’ 소리가 나와요. ‘아, 해방이 됐구나’ 깨달았어요. 신의주에 오니까 ‘만세’ 소리가 더 크게 들렸어요.”

— 봉천에서 평양까지 얼마나 걸렸나요.

“어쨌든 논스톱으로 왔는데, 하루 정도 걸린 것 같아요. 봉천역에서 승객을 가득 싣고 왔는데, 중간 정차역에서 타고 내리는 사람도 없었어요. 그때는 신의주나 평양에 소련군도 보이지 않았고요.”

— 장군님의 선견지명(先見之明) 덕분에 사모님께서 무사히 귀국하셨군요.

“그때 못 나왔으면 저는 죽었을 거예요. 돈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게다가 또 임신까지 했지. 남편이 늘 그랬어요. ‘당신, 그때 안 나왔으면 죽었다’고.”


“날강냉이 먹으며 귀환”

— 기록에 보면, 백 장군님은 사모님과 헤어져 수백km의 먼 길을 꼬박 한 달 걸려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평양에 오니 벌써 소련군이 38선 이북을 점령하고 있었고, 김일성(金日成)이 출현해 급격히 부상하던 시기였다고 합니다.

“남편은 귀국하면서 설사병이 걸려서 피골(皮骨)이 상접(相接)해서 왔어요. 그때만 해도 자기네 먹을 것도 장담을 못 하니까 인심이 박했거든요. 재워주지 않아 지붕 밑에서 이슬을 피해 가며 잤고, 날강냉이를 씹어 먹으며 오다 병이 났지요.”

— 사모님을 보고 첫마디가 무엇이었나요.

“사람이 기운이 없으니 무슨 특별한 얘기를 하겠어요. 평양 친정집 바로 앞에 양의사가 있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했어요. 암튼 몸을 회복한 다음 조만식 선생님 사무실에 출근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가 만주에서 남편에게 부탁한 제 패물과 옷가지가 담긴 보따리를 몽땅 잃어버렸더라고요. 남편에게 귀중품과 좋은 옷가지를 맡기고 저는 시시한 것만 챙겨 왔는데….”

— 사모님은 평양에 도착하셔서 시어머님께 가셨나요.

“제가 길림에서 나올 때 임신한 줄 모르고 나왔거든요. 그때는 이미 친정 식구들은 서울로 이사를 간 후였어요. 대동강 건너 신리(新里)에 있는 시누이댁은 애가 다섯인 데다 방도 두 개밖에 없고, 하는 수 없이 친정으로 갔지요. 부모님은 이남으로 가셨지만, 대동군 기림리에 사는 우리 식구가 또 계셨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애를 평양 친정집에서 낳고 서울로 데려가기로 했어요.”

— 그때 임신하신 태아는 출산하셨나요.

“남편은 임신한 저를 걱정하면서 1945년 12월 하순 월남했어요. 1946년 봄에 딸아이를 낳았는데, 그만 석 달 만에 죽고 말았어요. 그래서 예정보다 일찍 서울로 내려온 거지요.”


“죽은 아이, 보자기에 싸서 산에 묻어”

— 너무 마음이 아프셨겠어요.

“애가 죽었다고 친할머니와 시어머니에게 연락했죠. 그 아이를 널(관)에다 집어넣었는데, 그때는 옷도 제대로 없잖아요. 애를 옷도 제대로 입히지 않고 보자기에 싸서 산에다 묻었어요. 제가 이남에 내려오니 남편이 나한테 이러는 거예요. ‘꿈에 남덕이가 나타났는데, 아버지 나 추워요’라고 하더래요. 아무것도 안 입혀 보낸 아이가 꿈에 나타나 그런 소리를 하니 얼마나 불쌍해요.”

— 시어머님은 잘 위로해 주시던가요.

“시댁 식구들은 식솔도 많고 생활이 어려워 저한테 마음을 써줄 형편이 못 됐어요. 한 번은 제가 남덕이를 업고 시댁에 갔었어요. 그랬는데 아이가 죽은 다음에 시어머니가 그러세요. ‘내가 남덕이를 봤을 때 죽을 줄 알았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만주에서 말라리아와 강냉이밖에 못 먹은 상태에서 피란열차를 타고 몸이 약해져서 배 속 아이도 약해졌던 것 같아요.”

— 김일성이 부각되면서 북한이 공산화될 조짐을 보였습니다. 백 장군님은 동생 백인엽 장군을 먼저 내보낸 후 뒤따라 38선을 넘었지요?

“남편이 평양에서 조만식 선생님을 보좌할 적에 정일권(丁一權) 장군이 크고 넓은 친정집에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셨어요. 이때쯤 헌병사령관을 지내신 원용덕(元容德), 박기병(朴基柄) 같은 분들이 남편을 찾아와 정세를 물었어요. 남편은 이남으로 가라고 종용했고, 정일권 장군은 시동생(백인엽)과 함께 12월 초에 월남했지요. 남편도 12월 하순에 김백일(金白一), 최남근(崔楠根)과 함께 38선을 넘었지요. 이때 저의 두 남동생(노원부, 노원덕)도 함께 내려왔어요.”

— 사모님이 38선을 넘은 것은 언젭니까.

“애가 죽고 한 달이 채 안 됐을 때니까 아마 1946년 5~6월경일 거예요. 육군본부 군수국장을 지내신 백선진(白善鎭) 장군(재무장관 역임) 부인도 저처럼 평양에 머물고 계셨어요. 서로 ‘형님, 형님’ 하며 지냈는데, 백선진 장군 어머니와 부인, 시동생 이렇게 넷이 38선을 넘었어요. 백 장군 어머니께서 젊은 여자들은 38선 경비병에게 검문을 받을까 봐 무거운 짐은 당신이 맡으시고, 저희는 간단한 짐만 들려서 먼저 넘어가라고 하셨어요. 우리는 낮에 넘었는데, 검문을 받지 않았고, 백 장군님 어머니는 밤에 월경하면서 총격 소리를 들으셨다고 해요.”


5연대 시절

평양에서 월남한 백선엽은 이응준(李應俊) 장군(중장 예편)의 추천을 받아 1946년 2월 27일 국방경비대 중위로 임관했다. 백선엽은 과거의 군사 경험을 인정받아 군사영어학교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산에 창설 중인 5연대(당시는 중대 규모)에 부임했다. 미 24군단 주도로 최초엔 1개 중대를 우선 편성하고, 현지 모병으로 인원이 차는 대로 대대, 연대로 확대 개편했다.

— 백 장군님은 1947년 1월 중령 계급장을 달고 부산의 5연대장에 부임합니다.

“저도 남편이 부산으로 떠난 다음, 신당동 친정집을 떠나 5연대 본부가 있는 부산 감천리(甘川里)로 내려갔어요. 처음 그곳을 찾아가는데, 부산 사람들이 국방경비대 5연대의 위치를 몰라요. 가만 생각하다 부산시청을 찾아가니 감천리에 있다고 알려줘요. 감천리 들어가는 군용 트럭을 얻어 타고 남편에게 갔습니다.”

— 창군 초기 부산 5연대장으로 함께했던 분들은 누가 있나요.

“박병권(朴炳權) 소위(중장 예편,국방장관 역임), 이치업(李致業) 소위(준장 예편), 오덕준(吳德俊) 소위(소장 예편), 박진경(朴珍景) 소위(제주 4·3 사태 진압 중 전사) 등이 계셨고요, 나중에 신상철(申尙澈) 소위(소장 예편, 체신장관 역임), 김익렬(金益烈) 소위(중장 예편), 백남권 소위(소장 예편), 송요찬(宋堯讚) 소위(중장 예편, 내각 수반 역임), 이후락(李厚洛) 소위(소장 예편, 중앙정보부장 역임) 등이 합류했어요. 송요찬 장군은 부산 5연대부터 다부동을 거쳐 남편이 1군단장, 그리고 백야전사령부의 공비 토벌 때도 함께 싸웠던 분입니다.”


‘마쓰이 료칸’

— 창군 초기라 장교 부인들이 생활하기엔 엄청나게 불편했을 텐데요.

“바닷가 옆 감천리에 위치한 5연대 본부는 장교 관사를 일자형으로 지었어요. 그곳에 방 한 칸씩을 배정해 주었어요. 숙소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형편없었어요. 송요찬, 박병권 소위 등 총각 장교들 숙소는 좁았고요, 오덕준 소위를 비롯해 우리 옆방엔 이후락 소위, 그다음 백남권 소위 등 결혼한 장교들 숙소는 조금 넓었어요.”

— 숙소에 취사를 할 수 있는 부엌은 따로 있었나요.

“부엌이 어디 있어요. 장교들과 부인들은 취사장에 가서 밥을 얻어먹었어요. 별명이 ‘폐암’이라는 취사병이 잊히지도 않아요. 그 사람하고 취사병 셋이 우리에게 밥을 해주는데, 우리를 그렇게 무시하는 거예요. 김치를 담그라며 곤조(근성)를 부리는데, 하도 눈치가 보여서 이후락 소위 부인하고 교대로 김치를 담그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 폐암 취사병이 자기가 무시하던 장교들이 참모총장(백선엽)이 되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장(이후락)이 될 줄은 몰랐을 거예요(웃음).”

— 창군 초기에 병사들은 물론이고, 장교들도 무척 고생을 했네요.

“창군 때 우리 군대들 고생 많이 했어요. 국민들이 정말 그거 아셔야 해요.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면 병사들이 군대 노래(군가)하는 소리, 그걸 들으면서 잠에서 깨곤 했어요. 그곳에서 생활하다가 부산역 앞에 마쓰이료칸(松井旅館)으로 숙소를 옮겨주었는데, 시설은 감천리보다 나았어요.”

— 일본인이 영업하던 여관을 장교 관사로 제공했군요.

“대체로 3~4조, 큰 것은 6조의 다다미방을 가진 여관이었어요. 방을 한 칸씩을 주었는데, 우리는 2층에서 살았어요. 다다미를 일부 걷어 부엌으로 사용했어요. 그런데 2층엔 물이 나오지 않아 1층에 내려가 바케쓰(양동이)에 수돗물을 받아서 올라와 밥을 짓고 설거지를 했어요. 창문이 떨어져 나가도 창문 바를 돈도 없었어요. 1947년 그해 연말 서울로 올라오기까지 1년간 그곳에서 살았는데, 정말 고생했어요. 그때 마침 국방경비대 총사령관인 이형근(李亨根) 장군이 저희 집에 오셔서 주무시고 가셨어요. 이형근 장군이 훗날 참모총장이 되시고 파티 때 저를 만날 때마다 ‘우리 미세스 백, 그때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라는 소리를 하셨어요.”


“배급 주는 걸로 살았어요”

— 사모님이 생활하시는 데 도움을 주신 분은 없나요.

“그때는 월급도 제대로 없고, 배급 주는 걸로 살았어요. 이치업 장군 형님이 한천(寒天·우뭇가사리 따위를 끓여서 식혀 만든 끈끈한 물질)을 만들어 군대에 보급하는 민간업자였는데, 사람이 참 점잖고 좋았어요. 그분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그때 둘째를 임신했는데, 병원에서 아들이라고 했어요.”

— 첫아들 소식에 기대가 크셨을 텐데, 산부인과를 다닐 형편은 되셨나요.

“돈이 없으니 병원엔 못 가고 산파(産婆)를 집에 부르곤 했었어요. 한번은 산파가 와서 보더니 배 속의 아이가 움직이지 않는대요. 병원에 빨리 가보라고 해요. 병원엘 갔더니 다짜고짜 입원을 시키고 수술을 하는 거예요. 그때만 해도 의술이 부족하고, 제왕절개 도구도 없어 의사가 손으로 애를 뜯어서 꺼냈어요. (노인숙 여사는 이 대목에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분이 ‘개업하고 이런 수술은 처음이다’고 해요. 그런데 자궁이 종잇장처럼 얇아져 또 손을 댈 수가 없어 완전히 꺼내지 못하니 밤새도록 복통에 시달렸고, 이튿날 마저 꺼냈어요.”

— 너무나 참혹합니다. 백 장군님도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모르셨겠는데요.

“그 사람도 안절부절못했지요. 산모(産母)가 미역국 먹고 몸조리를 해야 하는데, 마침 산부인과 원장이 미역국을 끓여다 줘서 그걸 먹고 기운을 차렸어요.”

노인숙 여사는 “퇴원해야 하는데, 막상 퇴원하려니 퇴원비가 없었다”며 “원장님에게 ‘지금 형편이 이래서 돈이 없는데, 다음에 갚으면 안 되겠느냐’고 했더니, ‘걱정하지 말고 몸을 잘 추스르시라’고 인정을 베풀어 퇴원했다”며 눈물을 닦았다.

— 장교들도 식솔이 있는 가장인데… 국방경비대 시절엔 월급이 전혀 안 나왔나요.

“내 기억엔 없어요. 줄 여력이 없으니까 못 줬겠지요. 저는 명주(明紬)에 물을 들여 치마저고리를 해 입었어요. 제가 바느질은 좀 하거든요.”

— 백 장군님이 어느 순간 ‘월급이다’라며 사모님한테 갖다주셨나요.

“‘연참(연합참모본부총장)’으로 가기 전까지는 받아보지 못했어요. 월급은 모두 부관들이 받아와요. 우리(백선엽)는요, 효자가 돼서… 다 어머니께 갖다 드렸어요. 살림살이를 어머니가 다 주관하셨으니까, 저는 그때까지도 어머니에게 용돈을 타서 쓰고 살았어요.”


“석 달 동안 숨어 지내”

— 백 장군님이 1948년 4월 통위부 정보국장 겸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으로 발령받으면서 서울로 올라왔다가 다시 1년 만인 이듬해 1949년 7월 광주의 5사단장으로 나가시는데, 이때도 따라가셨나요.

“광주는 잠깐 들렀더랬어요. 그곳에서 1950년 4월 초까지 5사단장을 하셨는데요, 큰딸(남희)이 돌이 지난 지 얼마 안 돼 광주에 계속 머물 수가 없어서 서울 신당동 친정으로 올라왔어요.”

—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어디에서 전쟁을 맞으셨나요.

“1948년 태어난 큰딸하고 신당동 친정에서 지냈어요. 1층엔 다다미방 3개, 2층엔 2개의 방이 있는 마당 넓은 집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그 넓은 마당에 왜 상추를 안 심어 먹었을까’ 생각하며 혼자 웃지요. 남편은 전쟁 내내 일선에 있었고요. 부산 5연대 때, 서울로 올라와서 정보국장 하실 때 함께 지내다가 수색에 있는 1사단장으로 가시면서 6·25 전쟁이 나고 내내 못 보았지요.”

— 6·25가 나던 날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고 하는데, 기억나세요?

“비 온 건 기억이 안 나는데, 우리 집에서 일하던 아이가 아침에 뛰어 들어오면서 ‘전쟁이 났다’고 소리쳐서 알았어요.”

— 백 장군님이 임진강 방어선에서 사투를 벌일 때 심정은요?

“신당동 친정집에서 피란도 못 가고 서울 수복될 때까지 석 달 동안 가슴 졸이면서 지낸 거지요. 아버지가 쌀도 베개 밑에 숨겨놓으시던 생각도 나는데, 콩죽을 많이 먹었어요. 콩을 갈아 죽으로 쑨 건데, 그때 그게 그렇게 맛있었어요. 지금처럼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 중계를 하면 즉각 알았겠지요. 그런데 당시에 라디오는 있었다고 하지만, 무슨 수로 소식을 듣겠어요? 모윤숙(毛允淑) 시인이랑 정부가 다 이남으로 내려갔다더라는… 그런 소리만 들었어요.”

주한미군 부부동반 만찬을 주최한 백선엽 참모총장 부부. 백 장군과 노인숙 여사가 테이블 중간에 앉아 웃고 있다. 사진=백선엽


“자기 책임 완수하겠다는 생각 강한 분”

— 다부동 전투 때 북한군은 장군님을 생포하라며 포상금까지 내걸었다고 합니다. 고위급 장교 가족이 적(敵) 치하에 있으면 이웃들의 밀고로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을 텐데요.

“다행히 우리 동네 사람들은 그럴 사람이 없었어요. 저는 석 달 동안 아예 바깥에 안 나갔어요. 저희 집 식구 모두가 그랬어요.”

— 1·4 후퇴 땐 피란을 하셨는지요.

“1·4 후퇴 땐 부산으로 내려갔지요. 창군 초기 부산 5연대 시절에 우리를 도와주셨던 이치업 장군의 형수가 절 좋아했거든요. 셋방 들어갈 돈도 없는데, 그 형님이 ‘동생, 나한테 와 있으라’고 해서 그 집 방 한 칸을 빌려서 지냈지요.”

— 다부동 전투가 한창일 때, 백 장군님의 근황을 듣고 계셨나요?

“그것도 후에 남편이 얘기해줘서 알게 됐지, 당시엔 까맣게 몰랐어요. 남편이 늘 얘기하는 것이, 다부동 전투의 승리는 우리 젊은 청년들의 피 흘린 대가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때 그 정신처럼 지금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하고 있다고 하셨어요.”

— 전투를 승리로 이끄시는 것을 보면 승부욕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승부욕보다 자기 책임은 완수하자는 생각이 강한 분이에요. 마이켈리스 대령(미 27연대장)이 ‘한국군이 후퇴하면 우리도 퇴로가 차단당하기 전에 후퇴하겠다’고 하니까, ‘후퇴하지 말고 기다리라’며 ‘내가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며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단장 돌격’을 한 것 아닙니까.”


“육군참모총장 임명 후 대구에 가족 모여”

— 백 장군님이 1951년 4월 소장 진급 신고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게 하기 위해 부산 임시경무대를 방문하면서 가족들과 재회하셨다고 하셨는데요.

“당시 시어머니와 시누이 가족, 저, 그리고 세 살짜리 딸이 부산의 초량(草梁) 단칸방에서 비참하게 생활할 때였어요. 그때도 남편이 왜 왔는지 몰랐어요. 우리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셨을 거예요. 그때도 문 앞에서 큰딸도 못 보고 제 얼굴만 잠깐 보고 갔어요. 저는 장티푸스를 앓아 사경을 헤매던 후라 야위어 있었어요.”

— 백 장군님은 생전에 평양 탈환에 대해 ‘1950년 10월 19일, 일개 월남 청년이 장군이 되어 1만5000여 한미 장병을 지휘하며 고향을 탈환하러 진군하는 감회를 어찌 필설로 표현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때 사모님의 심정은요.

“나중에 남편에게 들었지만, 한마디로 정말 감격스러웠죠. 나는 평양 시내에서 살고, 시댁은 강 건너 신리에서 살았어요. 그곳에서 남편이 수영을 했으니 어디가 물이 깊고 얕은지 대동강에 대해 잘 알잖아요. 저도 그곳에서 스케이트를 탔어요. 저는 그 얘기만 듣고도 기뻤는데, 전투하면서 진격하는 당신의 심정은 얼마나 기뻤겠어요.”

— 1952년 7월 부산 정치파동 이후 이종찬(李鍾贊) 육군참모총장이 물러나고 백 장군님이 1차 참모총장이 되었지요? 육군본부가 대구에 있던 시절인데, 장군님이 가족들과 이때 함께 생활하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1954년 2월 1군사령부 창설을 위해 원주로 떠나기 전까지 1년 6개월간 함께 생활했어요. 그때 큰아들(남혁)도 태어났지요. 1953년 1월 한국군 최초로 육군 대장이 되는 시기에 제가 임신해 그해 10월 15일 큰아들이 태어나니까 남편이 ‘대장 아들’이라며 기뻐했지요.”

— 첫아들을 낳으셨는데, 장군님이 ‘깜짝 선물’이라도 해주시던가요?

“아니, 결혼반지도 없는데 선물은 무슨 선물이겠어요? 저는 불평하지도 바가지 긁지도 않고 살았어요.”


“화가 날 수록 존댓말”

— 백 장군님이 군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제치고 최초의 4성 장군이 됐을 때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처음엔 놀랐지만, 당연히 기뻤고요. 처음 시댁에 갔을 때, 시댁 식구들이 ‘우리 선엽이는 포용력이 있어 이다음에 큰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를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하더라고요.”

— 백 장군님이 좋아하신 장군들은 누가 있습니까.

“1사단장으로 다부동 전투할 때 함께 연대장으로 싸운 분들을 좋아하셨어요. 김점곤(金點坤) 장군(소장 예편)을 제일 좋아하셨고, 최영희(崔榮喜) 장군(국방장관 역임)과는 흉허물없는 사이였습니다. 1사단장 시설 참모장을 하신 석주암(石主岩) 장군(소장 예편)과는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셨고요. 유재흥(劉載興) 장군(국방장관 역임)과도 무척 돈독했습니다. 군 선배 격인 정일권 장군과도 가깝게 지내셨고요.”

— 백 장군님은 생전에 뵈면 스승과 같은 자애로운 면모를 많이 보이셨어요. 평양사범도 나오셨지만.

“본인은 적성에 맞지 않아서 군관학교에 갔다고 했지만, 아마 선생을 했어도 잘했을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여간해서 화를 내지 않아요.”

— 백선엽 장군님은 화가 날수록 더욱 자기 절제를 하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월사령관을 지낸 이세호(李世鎬) 육군총장이 백 장군님이 경어(敬語)를 쓰면 화가 나신 것이라 긴장했다고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만.

“그러니까 이승만 대통령도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보통 사람은 화가 날수록 막말을 하는데, 남편은 화가 날 수록 반대가 되는 분이에요. 상대방에게 존댓말을 하면서 자신을 억누르셔요.”

1953년 육군 대장으로 퇴역한 밴 플리트 장군이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사로 한국 재건사업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가 백선엽 대장과 정일권 대장을 만났다. 사진=백선엽

“밴플리트, 남편을 아들처럼 대했다”

— 백 장군님은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1892~1992년) 장군을 아버지처럼 대했더군요.

“밴 플리트와 남편은 28세 차이예요. 아들 존이 1925년생이었으니 온전하게 자식뻘이지요. 밴 플리트 장군이 남편을 바라보는 눈길을 보면, 아버지가 대견스러운 자식을 바라보듯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았어요. 옆에서도 그게 느껴지더라고요. 32세의 남편이 총장직을 맡으면서 59세의 밴 플리트 사령관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더니 ‘참모와 예하 지휘관의 말을 많이 듣고 말을 많이 하지 마라’ ‘예스와 노를 분명히 하라’ ‘어려운 일에 봉착하더라도 조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마라’ ‘결코 사람들 앞에서 화내지 마라’고 조언해 주었다고 해요.”

— 1952년 4월 5일 소토고미리의 2군단 창설식 직후,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 존이 B-26 전폭기를 몰고 폭격에 나섰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밴 플리트는 백 장군님과 함께 아들이 근무했던 군산 기지를 함께 가기도 했습니다. 부인 헬렌 여사는 백 장군님께 수색을 요청하기도 했지요. 같은 어머니로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가슴이 무너질 거예요. 밴 플리트 사령관이 태연하게 아들 수색에 희생이 따를지 모르니 수색을 중단하라고 한 것을 보고, 그분은 보통 사람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 백 장군님이 좋아하시는 요리는 어떤 건가요.

“순이북식을 좋아했어요. 제 ‘18번’이 녹두 빈대떡하고 만두예요. 그냥 녹두빈대떡이 아니고 묽게 반죽을 해서 얇게 부쳐요. 남쪽에선 두껍게 해서 기름에 튀기는데, 저는 지지미에 가까워요. 손자가 할머니 빈대떡 이상 가는 거 먹어본 적 없대요(웃음). 며느리(이삼성)도 배워서 지금은 저만큼 잘해요. 만두는 잘 익은 김치에다 텁텁한 느낌이 드는 두부를 빼고, 고기를 넣어서 만들어요. 비지는 콩을 갈아 끓여서 만드는데, 정말 고소하죠.”

— 평안도 분들은 한겨울에 얼음이 버석거리는 동치미에다 찬밥을 말아 드시지 않나요?

“기자님 어떻게 아세요? (기자가 부친 고향이 평남 평원이라고 하자) 그래서 아는구먼요. 장군님도 ‘밤참’으로 동치미에 찬밥에 말아 드시는 걸 좋아하셨어요.”


“대장 아버지는 우리의 영웅”

— 1951년 11월 지리산 공비토벌 때 수많은 고아가 발생하자 백 장군님은 광주 송정리(松汀里)에 ‘백선육아원’을 만들었습니다. 1988년부터 천주교 살트르 성바오로 수녀회가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모님도 육아원에 가보셨나요.

“여러 번 갔지요. 당시 30대였던 남편은 눈밭에 버려진 전쟁고아들을 위해 이을식(李乙植) 전남지사의 도움으로 송정리의 적산가옥을 매입했어요. 보육원에 모인 200여 명 대부분이 열 살도 안 된 고아들이었어요. 1952년 보육원이 문을 연 뒤 미 8군과 종군기자 출신으로 선명회 초대총재가 된 피어즈 박사 같은 분들이 옷가지와 음식을 지원해 주셨고, 고아들을 고교 과정까지 가르쳤지요.”

— 전쟁 와중에 전투만 하신 것이 아니라 어려운 처지의 고아들까지 돌보았다니 놀라울 뿐입니다. 아마도 장군님이 어렸을 때 혹독한 가난을 겪었기 때문에 불쌍한 이들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남편이 생을 마감했을 때, 70대 중반의 전쟁고아들이 아산중앙병원 빈소를 찾아와 조문하면서 접견실로 저를 찾아와 ‘어머니, 앞으로도 효도하겠습니다’라고 하고, ‘대장 아버지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게 해준 영웅’이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좋은 일을 한 것은 맞는 것 같아요.”

기자가 “아내로서 남편 백선엽 장군에게 몇 점을 주실 수 있느냐”고 하자, “남편을 점수로 매길 수는 없고, 남편이 치른 6·25 전쟁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감격의 연속”이라면서 “죽어서 전우들 곁에 묻히고 싶다는 당신의 소원도 이뤘으니 이젠 편히 쉬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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