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8월 19일 충남대에서 열린 전대협 발족식. 주사파 조직인 반미청년회가 배후 조종했다./월간조선 2017년 3월호

극(極)과 극은 대체로 상통한다. 극우(極右)와 극좌(極左)는 쉽게 공명한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가(道家) 사상이 법무불위(法無不爲, 법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의 법가(法家) 사상을 낳았다는 학설이 있다. 독일 제3 제국의 나치즘과 구소련의 스탈린주의는 전체주의적 쌍둥이(totalitarian twins)였다는 주장도 있다. 양극단의 한 뿌리를 직시하지 못하면 정치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설명할 길이 없다. 1960-70년대 대한민국에서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고 자랐던 세대가 1980~90년대 대학가에서 소위 “주사파”로 돌변했던 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시대착오적 주사파, 한국 대학가 장악

1980~90년대 한국 대학가의 학생운동은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 만세”를 공공연히 외치는 주사파의 놀이터가 되었다. 당시 세계사의 흐름을 돌아보면, 1980~90년대 한국 대학가 극좌 세력의 시대착오와 무지몽매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1986년부터 일기 시작한 혁명의 돌풍은 공산주의가 이미 몰락했음을 알리는 거대한 신호탄이었다. 특히 1989년엔 폴란드, 동독,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줄도산했다. 1989년 4월부터 일어난 중국의 민주화 운동은 6월 4일 톈안먼 대학살로 무참히 짓밟혔지만, 같은 해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했다. 급기야 1991년 12월 25일 사회주의 종주국 구소련이 해체됐다.

1989년 6월 30일 전대협 주체로 한양대에서 열린 ‘모의평양축전’ 행사장에서 참가한 학생들이 화염병을 던지며 진압경찰에 맞서고 있다./조선DB

1980년대 대한민국은 한미군사동맹의 엄호 아래서 개방형 수출입국 정책에 따라 파죽지세로 세계 시장을 향해 뻗어나가며 연평균 10%에 달하는 경제성장의 기적을 이어가고 있었다. 급속한 경제성장의 결과 1980~90년대 대한민국은 고도의 대중 소비 사회로 변모했다. 그 당시 대학생들은 외국어 실력이 일천해도, 성적표에 쌍권총이 달려 있어도 얼렁뚱땅 졸업만 하면 쉽게 일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1990년대부턴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어 유럽 전역에 한국인 배낭족이 넘쳐났고, 웬만큼 살면 한 대씩 차를 뽑는 “마이카(my car) 시대”가 활짝 열렸다. 한국의 경제 현실은 그렇게 날로 다르게 변해가는데도 대학가는 “김일성 수령의 교시에 따라” “주체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남조선에서 미제를 몰아내는 민족해방의 혁명”을 추구하고 있었다. 실로 낡고 뒤틀리고 꽉 막힌 극좌 세력이 캠퍼스를 붉게 물들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한 자리씩 잡았던 바로 그 인물들은 그 후로 30년 승승장구하며 한국 정치판을 쥐락펴락해왔다. 세계사의 큰 흐름에 정면으로 역행하며 “위수김동”의 교시를 떠받들던 주사파 운동권이 대한민국의 정치권력을 장악한 불합리와 부조리를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대체 무슨 역사의 신이 개입하여, 이성(理性)의 간지(奸智)가 작용해서 주사파와 같은 극좌의 수구세력이 진보의 훈장을 달고 30년을 설쳐대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일어났을까?

1980년대 신군부의 “국풍”

1981년 2월 25일 출범한 제5공화국의 “신군부”는 석 달 후인 5월 28일부터 닷새 동안 여의도에서 대규모 관제 축제 “국풍(國風) 81″을 개최했다. 당시 행사를 주관한 KBS는 민족문화의 주체성을 고취하고 국학에 대한 젊은 층의 관심을 제고하기 위한 문화축제라 선전했다. 여의도 광장에선 사물놀이, 줄다리기, 사자놀이, 고싸움놀이 등등 다양한 민속놀이가 다채롭게 펼쳐졌다. 주최 측 통산으론 전국 194개 대학 6천여 명의 학생, 민속인, 연예인 등 1만여 명이 참여해 총 659회의 공연을 올렸고, 동원된 관객 수는 전국적으로 1천만 명에 달했다.

관 주도의 예술 축제가 당시 들끓는 “신군부”의 정치 이벤트라는 비판이 자자했음에도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고 보인다. 단적인 예로 “국풍 81, 젊은이의 가요제”에서 금상을 받은 가수 이용의 데뷔곡 “바람이려오”는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새삼 43년 전의 관제 예술제를 떠올리는 이유는 당시 청와대 제1 정무비서관 허문도(1940-2016)가 고안했다는 바로 그 “국풍”이라는 기발한 명칭 때문이다.

1981년 전두환 정권 아래서 열린 “국풍 81”: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신군부의 구호, “겨레의 신바람, 겨레의 흥, 겨레의 멋”이란 구호가 보인다./공공부문

유가 경전 <<시경(詩經)>><국풍>에는 서주 초기부터 춘추시대까지 15개 제후국에서 널리 불리던 다양한 민가(民歌)들이 담겨 있다. 일상의 시름을 덜기 위해 부른 농부들의 노동요(勞動謠), 청춘남녀의 풋풋한 사랑과 때론 농염한 에로티시즘이 담긴 연애가(戀愛歌), 권력자를 조롱하는 풍자(諷刺)와 탐관오리를 때리는 민중의 채찍질까지 고대인의 희로애락이 담긴 160편의 노랫말이 <<시경>><국풍>에 채록되어 있다.

1981년 관 주도의 대중 축제를 기획했던 허문도는 과연 어떻게 “국풍”이란 표제어를 떠올릴 수 있었을까? 그가 <<시경>><국풍>의 의미와 가치를 진정 알고 있었을까? 그랬다고 볼 수는 없을 듯하다. <<시경>>의 “국풍”이란 민족 형성 이전 여러 지방 제후국의 다양한 풍습을 담고 있지만, 허문도가 내세운 국풍(國風)은 하나의 국가와 하나의 민족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국풍이란 국사(國史), 국어(國語), 국토(國土), 국사(國師), 국교(國敎), 국학(國學), 국기(國旗), 국기(國伎), 국민(國民) 등의 사례처럼 단일한 민족국가를 상정하고 있다. 그 의미를 풀자면, 민족 고유의 풍습이나 국가의 기풍(氣風)이나 민족의 고유 풍습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극심한 정통성 시비에 휩싸였던 제5공화국 “신군부”는 성난 민심의 수습을 위해 프로야구를 신설하고, 중·고생 교복·두발 자율화 정책을 시행하고, 사교육을 전면 금지했다. 국풍의 기획도 같은 맥락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유신체제는 초중고교 학생들에게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간명한 문장으로 민족적 정체성을 심어주었다.

극좌 운동권의 다섯 가지 역발상

1960~70년대 초·중·고교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귀에 못박이도록 들었던 “유신(維新)의 아이들”은 1980년대 대학가에서 “김일성의 아이들”로 거듭났다. 박정희 정권과 김일성 정권의 맞대결을 생각하면 의아한 일이지만, 유신 정권 아래서 강력한 민족주의 교육을 이수한 세대가 1980년대 대학가에서 김일성 주체사상에 매료된 이유는 어렵잖게 설명된다.

“국민교육헌장”은 1968년 11월 26일 국회 만장일치의 동의에 따라 박정희 전 대한민국 대통령이 12월 5일 발표한 당대 대한민국 교육의 지표를 담은 헌장이다./공공부문

수출입국의 산업화 전략 아래서 세계 전역으로 뻗어나가던 박정희 정권은 국민 통합의 구심을 잡기 위해 개개인의 의식 속에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심으려 했다. 김일성 정권은 반제국주의 사회주의 건설의 최종 목표를 민족 주체성의 확립이라 표방했다. 전자는 국제적 연대를 지향하는 자유 진영의 개방주의 시장경제를 추구했고, 후자는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폐쇄적인 사회주의 혁명 노선을 따랐다. 표면상 양자는 물과 기름처럼 상충적이었지만, 민족주의를 지상의 목표로 내세웠다는 점에선 합력(合力)의 포인트가 있었다. 극과 극이 민족의 이름으로 철썩 달라붙는 아이러니였다.

유신 교육의 모범생들이 “김일성의 아이들”이 되는 과정은 간단했다. 12년간 초·중·고교에서 배운 바를 정반대로 뒤집어서 대충 다섯 가지 역발상을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첫째는 바로 “박정희가 친일 분자였고, 김일성이 항일 투사”라는 역발상이었다. 둘째는 “대한민국이 친일파가 외세와 결탁해서 급조한 나라이고, 북한은 항일 투사가 외세를 배격해서 만든 나라”라는 역발상이었다. 셋째는 “대한민국이 영구 분단 획책 세력이고, 북한이 통일 세력”이란 역발상이었다. 넷째는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민중을 착취하는 악마적 제도이고, 공산주의 명령경제가 노동자·농민 주도의 좋은 제도라는 역발상이었다. 다섯째는 미국이 사악한 제국주의 국가이고, 소련·중국이 구조화된 착취제도를 철폐하고 3세계 인민의 해방을 지원하는 반제국주의 국가라는 역발상이었다.

2007년 10월 4일 노무현 대통령의 방북 당시 ‘아리랑’ 공연에서는 ‘우리민족끼리’라는 구호가 등장했다./월간조선 2020년 3월호

이 다섯 가지 역발상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여러 방식으로 청년 대중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일례로 1980년대 대학가에는 박정희는 만주 군관학교를 거쳐 일본육사를 나온 일본군 장교이지만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 무장 게릴라 투쟁을 이끌었던 “민족의 영웅”이라는 풍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 풍문을 역사적 사실로 만들기 위해서 대한민국의 극좌 세력은 부단히 노력했다. 2009년 민족문화연구소가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이 대표적이다.

이 사전의 편찬자들은 박정희와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1920-2020)에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딱지를 붙이기 위해 “위관급 이상 장교와 오장급 이상 헌병으로 재직한 자”는 모두 친일파로 분류한다는 자의적 기준을 적용해서 논란을 빚었다. 상식적으로 “인명사전”의 편집자들이 개개인의 행위에 대한 상세한 조사 이전에 먼저 “위관급 이상 장교” 모두를 친일반민족행위자라 단정할 수 있는가? 그런 방식이라면 유신 정권에서 사법고시에 합격한 자나 신군부의 공영방송사에 근무한 이는 모두 독재정권의 부역자란 낙인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민족문화연구소는 과연 왜 그토록 집요하게 박정희와 백선엽을 친일파로 몰아가려 했을까? 근대화의 지도자 박정희와 자유 수호의 영웅 백선엽에 친일파의 오명을 씌움으로써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훼손하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하다. 대한민국이 친일파의 정권으로 낙인찍히는 순간, 민족사의 이단 세력으로 전락하고 만다. 동시에 북한 정권이 오히려 항일 무장투쟁에 뿌리를 둔 민족사의 정통 세력으로 재평가될 여지가 생겨난다.

1980년대 극좌 운동권 세력의 다섯 가지 역발상 중에서도 청년들의 심장에 불을 지른 가장 강력한 정치 감정(political emotion)은 바로 반일(反日)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유신의 아이들”이 “김일성의 아이들”로 거듭났던 이유는 “반공(反共) 민족주의”의 토양 속에 배태되어 있었다. 물론 “유신의 아이들”이 “김일성의 아이들”로 온전히 다시 태어나려면 반일 정서만으로는 태부족이었다. 정치적 좌우를 불문하고 “유신의 아이들”은 대부분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정치적 유전자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최근 재개봉된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공공부분

“유신의 아이들”이 “김일성의 아이들”로 다시 태어나려면 반일 감정에 반미(反美) 의식이 뒤섞여야만 했다. 그래야만 반(反)제국주의와 반(反)자본주의로 무장하여 “위수김동 만세”를 외치는 극좌 민족주의의 전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 박정희를 친일파로, 김일성을 항일 투사로 재인식한 유신의 아이들에게 투철한 반미 의식을 심어주는 과정은 그리 간단치 않았다.

“유신의 아이들”은 원폭을 가해 일제를 패망시킨 주체가 미국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또한 6.25남침의 주체가 북한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견고한 유신 시대의 신념을 조각내려면 학술어로 포장된 정교하고도 세련된 반미주의(anti-Americanism)의 이론이 필요했다. 1980년대 대한민국을 휩쓴 반미주의는 놀랍게도 바로 미국 학계에서 만들어진 수정주의(revisionism)에서 나왔다. 이 점에 대해선 다음 회에 이어가기로 한다.

성공한 대한민국의 정신병리학적 문화 지체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놀라운 성공의 역사였다. 2차대전 이후 신생 국가 중에서 대한민국처럼 불과 두 세대 만에 산업화, 민주화, 선진화를 달성하고, 나아가 문화 대국으로 우뚝 선 사례는 단언컨대 단 한 나라도 없다. 세계사에 빛나는 역사를 구현했음에도 한국 인문·사회과학 분야 지식인 중 다수는 아직도 대한민국의 역사를 폄훼하고 비방하려는 시대착오적 열정으로 들떠 있는 듯하다.

지난 30~40년 한국의 지식인들은 대한민국의 성공사를 폄훼하고 북한의 참담한 실패를 모두 바깥 탓으로 돌려 교묘하게 감싸고 도는 몰상식과 불합리를 보여왔다. 바로 그러한 지식인들이 자라나는 미래 세대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음은 대한민국의 커다란 불행이다. 문명사의 첨단에서 세계 10대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에서 대체 왜 그러한 정신병리학적 문화 지체가 계속되고 있는가? 이 활달한 인공지능(AI)의 시대 최첨단의 과학 기술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인문·사회과학계는 왜 아직도 구시대의 낡은 이념과 집단적 확증 편향에 사로잡혀 있어야만 할까? 지금부터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에서는 그 사상적 뿌리를 파헤쳐 보려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