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영우(千英宇·72) 한반도미래재단이사장은 외교·안보 문제와 관련한 국내 보수(保守) 전문가 그룹의 대표적인 논객이다. 이명박(李明博) 정부 당시 대통령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지낸 그는 모든 정세 판단의 기준을 국익(國益)에 맞춘다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 직전부터 빈 국제원자력기구(IAEA) 담당 참사관, 유엔 안보리 담당 참사관, 주유엔 차석대사, 6자회담 수석대표 등의 자격으로 거의 모든 북핵 문제 관련 국제 협상에 참여해 온 북핵(北核) 협상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2013년 현역에서 은퇴한 이후에는 한반도미래포럼을 설립해 매월 개최하는 공개토론회와 활발한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외교·안보 현안들에 대한 국내의 담론 형성에 기여해왔다.

천영우(72)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

지난 5월 중순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아시안 리더십 회의 참석차 귀국했을 때 천영우 이사장을 만났다. 그런데 좀 놀라운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와 김대중(金大中) 정권이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 직후부터 북한이 합의를 위반하고 있다는 정보가 지속적으로 파악되는 데도 이를 계속 무시했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북한이 파키스탄을 통해 우라늄 농축 방식의 핵무기 제조 기술을 확보하려 한 상황 등은 그간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 전 《아사히신문》 대기자나 마이크 치노이 전 CNN 동아시아특파원 등이 익명의 소식통의 말들을 인용해 부분적으로 소개한 내용이기는 하다. 그러나 현안을 다뤘던 국내의 핵심 관계자가 자신의 직접 경험을 밝힌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근무처인 간사이외국어대학에서 방학이 시작되면 다시 귀국해 인터뷰를 갖기로 약속을 잡았다. 이제 1990년대 중반 제네바 합의는 외교사료 공개 시간인 30년이 임박하고 있어 저널리즘뿐 아니라 역사 연구 차원에서도 정리를 시작해야 할 시기가 됐기 때문이었다.

한미 양국은 작년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미핵협의그룹(NCG)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이를 운영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6월 10일 한미핵협의그룹(NCG) 공동 기자회견. 사진=조선DB

‘한미동맹에 대한 의구심’

7월 18일 오전 종로의 한반도미래포럼 사무실에서 천영우 이사장을 다시 만났다. 먼저 최근 한반도 주변 정세에 영향을 미치는 변화들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월간조선》은 올해 4월호에서 오동룡 기자가 천 전 수석과 가진 상세한 인터뷰를 실었는데, 그 이후 북·러 정상회담과 한·미 정상회담 등 큰 변화들이 이어져 왔다.

- 지난 6월 19일 김정은-푸틴 회담에서 포괄적인 전략동반자협정이 체결돼 북한과 러시아가 군사동맹을 복원했습니다. 곧 이어서 워싱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담 때 한·미 양국의 정상이 만나 ‘한반도 핵억제 핵작전 지침에 관한 공동성명’을 채택했습니다. 이 공동성명의 취지는 무엇이었다고 봅니까.

“미국이 제공하게 될 확장 억제의 가시성(visibility)을 높임으로써 우리 국민들의 의구심을 해소시키려는 게 본질이었다고 봅니다.”

- 북한의 핵 도발에 대응하는 데 한·미 양국이 군사적 협력사항과 협의 절차들을 구체화시켜두면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한미핵협의그룹(NCG)을 만들고 구체화한다고 해서 실제로 기존의 확장 억제가 더 강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정부가 NCG를 만들고 해도 늘 우리는 뭔가 더 부족하고 미국으로부터 확실한 약속을 받으려 하고, 미국이 어떤 대응을 할지 알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 한미동맹에 대한 어떤 의구심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따라서 동맹의 건실성이나 품격 차원에서 보면 좋은 신호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美, 북핵 도발에는 핵무기로 대응할 것”

- 북한이 머지않아 대륙 간 탄도탄이나 잠수함 발사 미사일 등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핵능력까지 갖추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될 때 과연 미국이 자국의 도시들을 북핵 공격에 노출시키면서까지 한국에 핵우산을 제공할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사는 미국인이 거의 20만 명이 넘고 서울에만 15만 명 정도의 미국인이 살고 있습니다. 서울에 북한 핵이 떨어져 미국인의 0.1%만 사망한다 해도 150명 가까이가 희생됩니다. 그런 사태가 벌어졌을 때 미국이 과연 북한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까요? 대한민국 정부가 말려도 미국이 사용하려 할 겁니다. 미국은 전 세계 동맹국들과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의 핵 도발에 핵무기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 “우리가 구체적인 보장을 자꾸 미국 측에 주문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셨는데요.

“일본의 경우 오히려 미국의 전략핵잠수함들의 일본 항구 입항을 거절하면서도 미국의 확장 억제에 대한 신뢰는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핵 억제력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은닉성(隱匿性)입니다. 북한의 김정은은 만일 한국에 대해 핵공격을 가할 경우 길어도 30분 이내에 태평양 한복판이든 어디서든 발사되는 미국의 핵미사일 공격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또 미사일 방어체계가 발달한 요즘에는 북한이 미국으로 핵미사일을 발사해도 발사나 진입 단계에서 거의 요격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자국(自國) 도시들을 적국의 핵공격에 노출시키면서 우방국을 방어할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60년 전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이런 의문을 제기했을 때와는 전략 상황에 큰 변화가 있다는 사실에 유념해야 합니다.”

- 일본은 이미 핵 재처리 능력과 우라늄 농축 능력 등을 갖추고 있어서 언제든 결정만 하면 신속하게 핵무장을 할 수 있는 잠재적인 핵무장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보다 좀 여유가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도 잠재적 핵무장 능력은 갖춰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아직까지 가시적 노력이 진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 일본 정도의 잠재적 핵무장을 갖추는 데도 여러 해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아무런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허세만 부릴 경우 주변 각국이나 해외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오히려 웃음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美, 北의 제네바 합의 위반 덮어

사실 최근 미국의 확장 억제에 대한 신뢰성에 논란이 일 정도로 사태가 악화돼온 데는 북한의 핵무기 능력이 비약적으로 신장돼왔다는 배경이 있다. 이와 관련, 천영우 전 수석은 5월 25일 필자와 만났을 때 1990년대 자신이 외교 현장에서 겪었던 몇 가지 비화를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털어놨다. 바로 두 주일 전 노무현(盧武鉉) 정부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과 통일부 장관을 지냈던 이종석(李鍾奭) 세종연구소 명예연구위원과 가진 공개 토론회(통일나눔재단 주최)에서 북핵 문제의 원인을 놓고 벌인 날 선 토론의 여파가 남아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천 이사장은 먼저 IAEA(국제원자력기구) 담당 참사관으로 주오스트리아 대사관에서 근무할 때 겪었던 미국의 대응을 소개했다.

“미국 민주당의 클린턴 행정부가 1994년 북한과 제네바 합의를 한 직후, 유럽에서 플루토늄 밀매 조직이 독일에선가 검거됐는데, 그 밀매 조직이 대성은행인가 하는 북한은행에서 5000만 달러를 빌린 것으로 파악됐습니다(당시는 구소련 붕괴의 여파로 핵물질이 국제 암시장에서 거래되던 상황이었다-필자). 내가 IAEA이사회에서 이 문제를 제기하려 했더니 당시 미국 에너지부에서 나온 참사관이 ‘제발 제기하지 마라’고 극구 만류해 거론하지 않았다.”

결국 북한의 제네바 합의 위반이 드러났는데도 “미국이 쉬쉬해서 덮은 것”이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국제기구에서 공개토론하게 되면 바로 “미국이 북한에 사기당했음을 실토하게 되는 셈”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천영우 이사장은 말했다. 천 이사장은 또 “나중에 클린턴 행정부 때 백악관에서 비확산특보를 맡았던 게리 세이모어의 얘기를 들었는데, 그는 ‘북한은 제네바 합의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과학원 산하에 개발팀을 만들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시작했다’고 말했다”고 했다.

북한 외교관 아내 피살 사건

천영우 이사장은 또 “우리 외교부도 1998년부터 군축 비확산 담당 부서에서 북한이 우라늄 농축 방식으로 핵무기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파키스탄에 과학자들을 보내 협조 중이었음을 파악했지만, 제네바 합의를 지지하던 김대중 정부 시절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천 이사장은 “따라서 미국의 클린턴 정부도 북한이 파키스탄이 성공한 우라늄 농축 방식을 통한 핵무기용 방사능 물질 확보에 착수했음을 파악하지 못했을 리 없다”고 말했다.

당시 북한과 파키스탄 사이에서 우라늄 기술과 미사일 기술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던 비밀 협력은 충격적인 암살 사건으로 그 전황이 드러났다. 파키스탄에 파견된 북한 경제참사관의 부인 김신애(일명 김사내)가 1998년 6월 7일 암살당한 사건이었다. 천영우 이사장은 “이 암살 사건의 배경과 과정은 파키스탄 당국도 극도로 숨기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윤지준 주파키스탄 대사가 현지에 파견된 미국 및 영국 대사관 측을 탐문해 상세하게 외교부 본부에 보고했다”고 말했다.

영·미 양국 정보 당국이 파키스탄에서 암살 사건의 배경과 과정에 대한 조사를 벌였고, 이 사건은 짤막하게나마 파키스탄 신문에도 보도되기도 했다.

천영우 전 수석의 증언 등에 따르면, 암살 당시 파키스탄 핵무기의 대부로 불리던 A.Q. 칸 박사가 운영하던 연구소에는 북한에서 과학자 등 20명의 핵무기 및 미사일 관련 전문가들이 파견돼 우라늄 농축을 통한 핵무기 제조 기술 등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파키스탄이 최초의 핵무기 실험을 성공한 지 열흘 뒤 칸 박사의 저택에서 불과 몇 m 떨어진 거리에 살던 북한 대사관의 경제참사관 역할을 하던 강태윤의 아내 김신애가 의문스러운 총격을 받고 죽은 것이다.

이후 미국의 《LA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마이크 친노이 전 CNN 특파원 등이 탐사보도(《포린폴리시》, 2021년 10월호)를 통해 죽은 김신애가 북한에서 파견된 과학자 및 무기 거래상 그룹의 일원이었다고 보도했다. 김신애는 파키스탄과 북한 사이에 이뤄지고 있던 핵무기 및 미사일 기술 협력 등과 관련한 정보를 미국 정보기관에 넘겨주다가 파키스탄 정보기관에 발각됐다고 한다. 파키스탄 정보기관이 그런 의혹을 북한 대사관 측에 통보했고, 그 직후 김신애가 누군가에 의해 사살됐다는 것이다. 그 배후와 관련, 오히려 인도 정보부의 소행이었다는 등의 외신 보도도 나왔지만, 천영우 이사장은 배후에 북한 과학자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직후 김신애의 시신은 파키스탄 공군의 퇴역 장교들이 운영하던 샤힌 에어 인터내셔널사의 전세기에 실려 북한으로 이송됐다. 이 전세기는 미국제 C-130 군용수송기였는데 시신을 담은 관(棺)과 함께 핵폭탄 제조에 필요한 자료와 물질을 같이 수송했다. 세련된 우라늄 원심분리기들과 각종 도면 및 스케치, 원심분리 관련 기술 데이터뿐 아니라 원심분리를 통해 핵폭탄용으로 전환될 수 있는 저농축 우라늄 헥사플로라이드 가스까지 북한으로 운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과 파키스탄 사이의 이 같은 협조는 인도와의 치열한 군사경쟁 때문에 파키스탄 군부가 비밀리에 추진했던 것으로 파악돼 왔다. 이미 1993년 베나지르 부토 총리의 북한 방문을 계기로 파키스탄의 우라늄 농축 기술과 북한의 미사일 기술을 상호지원하는 협력체제가 비밀리에 시작돼 가동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다 거의 정부 통제에서 벗어나 핵개발 국가들에 방사능 물질과 핵무기 기술을 전파한 칸 박사의 활동으로 더욱 활발해졌던 것이었다고 밝혀져 왔다.

北, 전방위적으로 우라늄 농축 기기 수입

천영우 이사장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당시 북한이 전방위적으로 우라늄 농축 관련 기기를 해외에서 수입하고 있었다는 예들을 압축적으로 설명했다.

“민주당 정부 시절 북한이 영국 런던의 게트윅공항에서 우라늄 농축용 기기를 환적(換積)하려다 발각된 일이 있었습니다. 또 북한이 독일에서 우라늄 농축 기기를 수입하면서 중국 선양(瀋陽)의 의심스러운 한 회사를 수입선으로 지정해두었는데, 그 수입 상담을 진행한 인물이 바로 빈 주재 북한대표부에 근무하는 과학관으로 독일 옵트로닉스사와 협상해서 수입기로 한 것으로 드러나기까지 했지요. 또 (2003년) 이집트의 한 항구에서 유엔결의안 집행 차원에서 미국의 협조를 받은 이집트 당국이 북한이 수입하려던 우라늄 농축 관련 기기를 끌어내려 압수한 사건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 같은 정황들은 2007년 일본 《아사히신문》 대기자였던 후나바시 요이치가 출간한 역작 《한반도문제(The Peninsula Question)》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반도문제》는 미국 정부 당국자 등의 증언에 기초해 정황을 기술했다.

천영우 이사장은 “한승수 외교부 장관의 보좌관으로 근무하던 2001년, 냉전 시절 한때 우라늄 농축 방식으로 핵개발을 추진하다 포기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관계자들을 초청해 신라호텔에서 비밀 워크숍을 열었다”고 공개했다. 그는 “과연 북한이 어떤 식으로 우라늄 농축 방식의 핵무기 개발을 하면서 감출 수 있으며 후일 폐기가 가능할지 여부 등을 간접적으로나마 알아보기 위해 열었던 워크숍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같은 워크숍이나 북한의 우라늄 농축과 관련된 정황들은 외교부 안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외교부 출신의 다른 한 관계자는 7월 20일 인터뷰에서 “1990년대 말에는 햇볕정책뿐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일도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했다. 또 당시 외교부에서는 “군축·과학 관련 부서의 현안이나 파키스탄 등 서남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진 일들은 주변 4강 등 주요 국가에서 일어난 일들에 비해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의 등장

미국 정보 당국도 실무선에서는 이미 클린턴 정부 시절부터 우라늄 농축을 둘러싼 북한의 의심스러운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권 상층부에서는 제네바 합의 때부터 이어온 북한에 대한 외교적 개입과 관여 정책으로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노선을 끝까지 유지했다.

그러나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등장했을 즈음에는 북한의 제네바 합의 위반과 관련한 정보가 차고 넘쳐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후나바시 《아사히신문》 대기자의 저서에 따르면 부시 행정부는 2002년 2월부터 본격적인 정보 분석에 착수해 9월쯤에는 마치 로제타스톤을 찾아낸 것처럼 북한이 우라늄 농축을 통해 핵무기 개발 중이란 결론에 이르게 됐다고 한다. 각국에서 모은 정보들을 종합한 결과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 확인된 상황이었다는 것이다(The Peninsula Question, 123~124쪽).

이런 가운데 김대중 정부와 클린턴 행정부가 추진해 온 대북관여 정책을 비판적으로 지켜봐 온 도널드 럼스펠드 등 부시 행정부의 강성 핵심 인사들은 제네바 합의는 이미 북한의 위반으로 완전히 파기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같은 정세 판단에 따라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를 북한으로 보내 직접 우라늄 농축을 통한 핵무기 프로그램의 존재 여부를 확인한다는 대결적 협상 방식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실제로 부시 정부 초기 국무부 군축 담당 부장관이었던 존 볼턴이 출간한 회고록 1권 《항복은 정책옵션이 아니다(Surrender Is Not An Option, 2007)》에도 당시 확인된 북한의 제네바 합의 위반에 대한 분석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국무부에서 대북 교섭을 담당했던 협상파 잭 프리처드 대사의 경우 럼스펠드 국방장관, 볼턴, 딕 체니 부통령 등 강경파 네오콘들이 협상을 통해 북한의 핵개발을 해결하거나 최소한 늦출 수 있는 기회를 가로막았다고 자신의 회고록 《실패한 외교(Failed Diplomacy, 2007)》에 기술했다. 하지만 프리처드 대사도 정보 당국이 규명한 우라늄 농축 관련 정보에 대해서는 큰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켈리의 방북과 제네바 합의 파기

북한은 평양을 방문한 켈리 차관보의 통고에 대해 10월 3일 첫날 회담 때는 김계관 외무성 부상(차관)의 발언을 통해 “모두 미국이 꾸며낸 얘기”라며 반박만 할 뿐,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날 켈리를 만난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미국이 강압적으로 우리를 목 졸라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며 “미국 때문에 제네바 합의는 완전히 파기됐다”고 강경하게 맞섰다. 당시 50분간 계속된 발언에서 강 비서는 노동당과 정부 전체의 입장이라면서 핵무기용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하면서 “우리는 그보다 더한 무기도 개발하게 돼 있다”고 맞섰다.(《실패한 외교》, 35~40 쪽; 이용준, 《북핵 30년의 허상과 실상》 156~157쪽)

북한의 이 같은 시인에 따라 미국은 제네바 합의에 따른 중유 공급을 중지했고, 북한도 그해 12월 제네바 합의 파기의 책임을 미국에 돌리며 IAEA 사찰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이후 북한은 2003년 1월 NPT 탈퇴를 선언했고 2006년 10월 풍계리에서 1차 핵실험까지 실시했던 것이다.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 분석과 부시 행정부의 대응 등을 담은 미국 측 인사들의 회고록도 국내의 민주당 인사들이 회고록들을 출간한 전후인 2007년쯤부터 출간됐다. 그러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이나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등 민주당 측 인사들과 진보 진영은 거의 모든 책임을 켈리와 네오콘의 고압적인 대북 협상 스타일에 방점을 찍어 북핵 협상이 파탄 난 이유로 지적해 왔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은 2008년 출간한 회고록 《다시, 평화》에서 “북한은 2003년 1월, 지난 8년간 중단했던 핵 활동을 재개하고 본격적인 핵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했다”고까지 주장했다.(408쪽)

외교부, 북한 우라늄 농축 파악

이 같은 주장들에 대해 천영우 이사장은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을 비롯한 민주당 정부 측 인사들이 모든 책임을 켈리 차관보나 부시 행정부에 덮어씌우고 있지만 사실 제네바 합의는 이미 김대중 정권기에 북한 측의 위반으로 파탄이 났다”고 말했다. 그러며 “미국 정부 안의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해 아무런 이해가 없는 분들이 켈리를 악역으로 만들어 책임을 덮어씌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천영우 이사장은 켈리 차관보가 2002년 10월 서울과 평양을 방문했을 당시 자신이 겪었던 한 가지 관련된 소동을 소개했다. 켈리 차관보 방북 당시 천 이사장은 외교부 본부에서 유엔, IAEA 외교 등을 총괄하는 국제기구국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켈리 차관보가 평양에 가기 직전부터 천영우 국장은 IAEA 총회 참석차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출장을 가 있었는데, 켈리가 평양에 갔다 서울을 방문한 직후 이례적인 경험을 하게 됐다고 한다.

당시 천영우 국장은 IAEA 총회에 참석하는 기회에 올리 하이노넨 IAEA 안전조치국장과 북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의 검증 방안 등에 대해 협의하고 그 결과를 전문(電文)으로 보고했다. 2001년에 이어 2년째 하이노넨 국장과 가진 협의 결과를 외교부 본부로 보고한 것이었다. 그런데 본부에서 “민감한 문제는 전보로 보고하지 말고 귀국한 후에 구두(口頭)로 보고하라”는 이상한 지시가 내려왔다.

임동원의 추궁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청와대에서 임동원 특보가 빈에서 천 국장이 보낸 전문 보고를 읽은 후 외교부 이태식 차관보(주미 대사 역임)에게 “켈리가 (서울에) 와서 얘기한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천 국장이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며 심하게 추궁했다”고 한다.

빈 IAEA 출장에서 돌아온 천영우 국장은 2002년 10월 켈리의 방북 결과가 공개되기 이전에 먼저 최성홍 외교장관에게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 추진 정황에 대해 소상히 보고했다. 켈리가 평양에 갔다 서울로 돌아온 직후였다. 그랬더니 최 장관이 깜짝 놀라면서 “그러지 않아도 켈리가 평양에 다녀온 결과를 듣고 철저한 보안을 유지하는 중”이라면서 “이태식 차관보와 심윤조 북미국장만 알고 있으니 이 두 사람에게만 천 국장이 알고 있는 내용을 알려주라”고 했다. 그래서 이 차관보를 만나 보고를 했는데, 그때 이 차관보로부터 임동원 특보한테서 심한 추궁을 당한 후 “본부에 돌아온 후 구두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되었다는 설명을 들었다는 것이다.

천영우 이사장은 “어쨌든 최 장관, 이 차관보, 심윤조 북미국장은 켈리가 (서울에 돌아온 후 설명해 준) 방북 결과를 듣고서야 북한이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추진하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고 기억을 되살렸다. “국제기구국의 군축과는 1998~99년부터 팔로 업(follow up)하고 있었는데, 국제기구국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을 북미국 라인은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IAEA의 하이노넨 안전조치국장과 협의한 내용을 전문으로 보고서 (다들) 깜짝 놀랐던 것 같았다”고 말했다.

임동원의 주장

당시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로 대북포용 정책을 주도했던 임동원씨는 2015년 출간한 회고록 《피스메이커》의 개정판에서 당시 천영우 국장의 보고를 통해 우리 정부도 북한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을 확인했다는 얘기는 거론하지 않았다. 그는 북한이 “2004년 후반기부터 해마다 2~3개의 우라늄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분량의 고농축 우라늄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미국의 정보 판단은 왜곡·과장된 것이었다”고 강조했다.(521쪽) 우리 정보기관은 켈리의 방한 직후인 10월 7일 비로소 서울에 온 미국 정보요원 세 명으로부터 브리핑을 들었다고 한다. 임 전 장관은 그 후, 국내 정보기관의 보고에 의하면, “북한이 도입한 알루미늄관 같은 자재는 미사일 등 다른 목적에도 사용 가능한 다목적용으로 용도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며,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계획에 필수적인 장비와 부품들을 확보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고 기록했다.(517~518쪽)

임동원씨의 회고는 후나바시 대기자의 책 등에 나오는 정보들이나 존 볼턴 회고록 1권이 지적한 상황들과는 상당히 다른 평가다. 그리고 본인이 2001년 3월까지 1년 3개월간 국정원장을 지냈으면서도, 그동안 한·미 간의 정기적인 정보 교류와 협력 외에 우리 정보기관이 어떤 관련 정보를 수집했는지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6자 회담 대표 시절의 천영우 전 외교안보수석(왼쪽에서 두 번째). 사진=연합뉴스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아무튼 2003년 1월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한 데 이어 2006년 10월 함경북도 풍계리에서 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그러는 사이 주변 정세의 안정을 원하던 중국이 적극적으로 나서는 가운데 노무현 정부도 협상 국면을 되살리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면서 2003년 8월 말부터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베이징(北京)에서 시작됐다. 부시 행정부 역시 이라크 전쟁의 장기화로 네오콘들의 영향력이 퇴조하면서 집권 2기가 시작된 2005년부터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을 중심으로 6자회담 등 협상을 통해 북핵 문제에 대응해 가려 하는 등 새로운 국면이 전개됐다.

천영우 이사장은 2007년에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자격으로 6자회담에 수석대표로 참석해서 당시 북핵 문제의 외교적 해결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받았던 2·13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당시 국내 언론들은 소탈하고 온화한 성품인 천 본부장이 특유의 ‘조용한 카리스마’로 북한의 김계관 대표를 설득해 2·13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6자회담 시작 전 청와대 안의 보고회 당시 천영우 본부장은 “북한이 알루미늄관을 수입하려다 들통난 사건까지 포함해서 우라늄 농축과 관련된 진상을 이전부터 파악해온 대로 보고했다”고 한다. 천 이사장은 “당시 송민순 청와대외교안보수석이 반박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노 대통령은 보고 내용을 끝까지 진지하게 들으셨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후 노 대통령께서 보여주신 저에 대한 대우로 미뤄보면 (그때 보고를) 신뢰하신 것 같다”고 말했다.

천영우 이사장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할 때까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지낸 후 주영 대사, 외교부 2차관을 거쳐 2010년 10월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비서관으로 발탁돼 2년 반 동안 근무했다.

“푸틴, 미국에 대한 복수심 가득”

무기체계 등 군사 문제에 대해서도 전문적 식견을 갖춘 그는 7월 18일 다시 가진 인터뷰에서 냉철한 시각을 개진했다. 지정학적(地政學的) 경쟁 시대가 다시 한반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어서인지 6자회담 대표 시절 알려졌던 ‘조용한 카리스마’보다는 매파 현실주의자로서 인상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 지난 6월 19일 푸틴 방북 당시 북한과 러시아 사이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을 체결했는데, 군사동맹이 부활했다고 봅니까.

“군사동맹에 해당하는 내용을 담은 것은 북·러 협약 제4조인데 그 문구만 봐서는 러시아의 자동 개입을 보장한 것이라 볼 수 없습니다. 푸틴이 자기 필요에 따라 하려면 개입하고 않으려면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 놓은 것이지요. 즉각적인 지원을 제공할지 여부에 대해서도 러시아의 국내법에 따르도록 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조약 문안만을 가지고 해석하면 본질을 놓칠 수 있어요. 이 시점에 러·북 간의 조약 체결이 위험한 것은 과거 냉전 당시와 달리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치르면서 무기 지원을 해준 북한에 대해 부채(負債)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푸틴은 또 미국과 서방권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합니다. 미국에 복수할 기회가 생기면 절대 놓치지 않으려 하는 심리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인식들이 결합될 수 있으므로 북·러 조약이 한반도와 동북아 안보에 큰 위험 요인이 될 수 있어요. 1961년의 북·소 동맹 조약에 비해 내용이 약하더라도 이처럼 상황이 달라진 만큼 북·러 조약이 이행될 경우 우리나라에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천영우 전 수석은 북한과 러시아가 지난 6월 19일 체결한 북·러 포괄적 전략동반자 협정의 최대 수혜자는 중국이 될 것으로 보았다. 사진=로이터/뉴스1

“북·러 조약의 가장 큰 수혜자는 중국”

-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주시면?

“북·러 조약이 상호 양국이 공격을 받을 경우에 상호 지원한다고 하고 있지만, 러시아와 북한은 6·25 발발 때처럼 언제든 공세적인 전쟁을 시작하고도 방어전쟁이라고 주장하면서 동맹 조약을 발동시킬 수 있습니다. 또 북한이 우리 측의 대북(對北) 공격을 유도하는 도발을 시작하려 할 경우 안심하고 도발을 결행할 수 있게끔 하는 보험 역할을 이번 북·러 조약이 수행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북한에 대해 러시아가 일종의 ‘도발 면허증’을 발급한 셈이라 볼 수 있습니다.”

- 좀 더 넓은 동북아 지역 차원에서 북·러 조약이 갖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지역 안보 차원에서 제일 큰 전략적 수혜자는 중국이라고 봅니다. 북·러 조약은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경우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두게 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지요. 대만 침공 때 미국이 대만 방어에 집중할 역량을 줄이게 하는 효과를 중국은 기대할 수 있습니다. 중국이 공식적으로는 동아시아의 진영화(陣營化)를 반대한다며 북·러 조약에 자국이 연계되는 것을 꺼리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요. 하지만 내심 중국은 북·러 조약으로 엄청난 어부지리(漁父之利)를 누리고 있음을 놓칠 리가 없습니다.”

- 대만 유사시 북한의 군사적 대응 시나리오를 좀 구체적으로 예측해 주시면?

“중국은 대만 침공 때 북한이 한반도에서 도발을 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둘 수 있기 때문이지요. 만일 북·러 조약이 없다면 북한으로서는 주저하게 될 겁니다. 중국이 군사 지원을 해줄 여유가 없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제는 북·러 조약이 뒷배 역할을 해줄 수 있게 됐기 때문에 대만해협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북한이 안심하고 대남 도발을 할 수 있는 여건을 기대할 수 있게 된 셈입니다. 그래서 중국이 북·러 조약 체결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다는 해석은 좀 피상적인 분석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러시아 눈치 볼 필요 없다”

- 그러면 우리의 대응 방안은?

“러시아가 국력을 유럽에서 소모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최대한 국력을 소비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북한을 러시아가 돕고 싶어도 도울 힘이 모자라도록 만드는 것이 제일 좋은 방식이라고 봅니다. 동북아시아에서 러시아의 평화 파괴 능력을 줄이기 위해 유럽에서 국력을 소진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 우리나라가 우크라이나에 공격용 무기를 제공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우리는 더 이상 러시아의 눈치를 보거나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앞으로 다시 러시아의 태도를 봐가면서 공격용 무기를 제공할지 여부를 결정하려 한다면 또다시 푸틴의 이중 플레이에 농락당할 여지를 주게 됩니다. 먼저 공격 무기 제공을 기정사실화하고 나서, 그 방침을 앞으로 대러 관계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이후 러시아가 대북 관계를 바꾸면 거기에 맞춰서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무기의 종류와 규모를 조정해 가야 합니다.”

- 지금 정부의 입장보다 더 강경한 입장인 것 같습니다.

“현 정부가 정말 푸틴의 러시아를 잘 알고 대응하는지 의문스럽습니다. 푸틴을 압박할 수 있는 급소를 먼저 눌러놓고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펴야지, 급소는 누르지도 않고 푸틴의 눈치부터 보는 것은 푸틴에게는 통하지 않는 대응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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