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말했다. ‘세상을 바꿀 만한 거대한 사건은 1면 톱이 아니라 사회면 귀퉁이에 처음 실린다’라고. 그래서 만났다. 탈북민 출신 박충권(朴冲綣·38) 의원이다.

2024년 7월 29일 더불어민주당 최민희 의원의 발언이 큰 파장을 불렀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인 최 의원은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인사청문회에서 국민의힘 박충권 의원에게 “전체주의 국가에서 생활하시다 보니 민주주의적 원칙이 안 보이는가”라고 말했다. 박 의원이 MBC를 민주당의 ‘홍위병(紅衛兵)’으로, 민주당 주도 청문회를 ‘인민재판’으로 표현하자 이에 대응한다며 인신공격성 발언을 한 것이다. 선을 넘은 언사였다.

탈북민 출신 국민의힘 박충권 의원.

“북한 이탈 주민에 대한 공격”

-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처음엔 몰랐어요. 그 발언을 직접 듣지 못했거든요. 제가 지금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상임위에서 활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과방위는 과학 기술과 방송 통신을 다루는데, 방송이라는 이슈에만 매몰되어 있습니다. 과학 기술, ICT 통신과 관련한 이슈 같은 민생 현안들은 다루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런 와중에 이진숙 방통위원장 후보자의 청문회가 열렸죠. 장관급 후보자 청문회가 3일간 진행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제가 보기엔 편파적이고 공정하지 않은 진행, 후보자 개인에 대한 인신공격성 발언들이 난무했죠. 그래서 회의 진행 방식에 대해 지적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논쟁하고 다투는 과정에서 최민희 위원장의 발언이 나온 거예요.”

박충권 의원은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논쟁하느라 발언 당시엔 그 말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다른 사안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데 약간 이상한 말을 듣기는 했어요. ‘이건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확실하지 않아서 보좌진에게 ‘속기록을 한 번 확인해달라’라고 얘기하고 다시 회의에 참석했죠. 확인해 봤더니 그 말이 맞는 겁니다.”

- 화가 나던가요?

“네. 그 순간 분노가 굉장히 많이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 말은 제 신상에 대한 공격이며 명예훼손이고, 또 저뿐만 아니라 3만4000여 명 북한 이탈 주민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니까요. 그 회의가 2시간 넘게 진행이 됐는데 회의 내내 애써 감정을 진정시켜 보려고 많이 노력했습니다. 근데 그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더라고요.”

‘북한은 전체주의 국가’ 인정(?)

- 회의 진행 중에 밖에서는 벌써 이 발언으로 난리가 났습니다. 도하 언론이 실시간으로 다 보도했으니까요.

“감정이 제어가 안 된 상태에서 제가 대응하게 되면 국회 상임위 정상 운영에 방해가 될 것 같아서 꾹 참았습니다. 사실은 많이 노력하긴 했는데 잘 안 참아졌어요. 그래서 신상 발언을 통해 항의하려고 준비했죠. 페이스북에 글도 올리고요.”

- 그런데 최민희 위원장이 사과했습니다.

“여론이 안 좋아지니까 갑자기 사과하더군요.”

- 어쨌건 사과를 받아들였습니다.

“저는 최 위원장이 사과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사과를 딱 해버리니까 고민이 되더라고요. 이 사과를 받아야 하는가? 제 신상 문제로 상임위가 파행된다면 좋지 않다고 생각해 제 개인적으로는 사과를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날도 언급한 것처럼, 3만4000여 명의 북한 이탈 주민이 느낄 감정과 그들이 입은 명예훼손에 대해서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최민희 의원의 발언은 다른 맥락에서 매우 중요하다. 야당 중진의원이 ‘북한은 전체주의 국가’라고 아주 확실하게 입장 표명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죠. 그 발언 그대로, 최민희 위원장께서 하신 그 워딩 그대로라고 한다면 최 위원장님은 북한이라는 체제를 ‘전체주의 국가다’라고 아주 확실하게 인정하신 거죠.”

그렇다면 야당도 북 주민을 해방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문명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류적 의무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굶어 죽는 것 봤다”

박충권 의원은 함흥 태생으로, 2009년에 한국에 왔다. 북한에서는 김정은국방종합대학교라는, ICBM을 개발하는 대학을 졸업했고 대한민국에 와서는 서울대에서 석사, 박사, 박사 연구원으로 8년 정도 학업에 올인했다. 졸업 후 현대제철에서 7년 정도 연구원으로 일하다 이번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로 당선했다. 북한에서는 영재고등학교인 제1고등학교를 나올 만큼 토대도 좋았다. 북에서는 고위직 출세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무엇이 그를 탈북의 길로 이끌었을까?

“1995년도부터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죠. 주변에서 학급 동기들 그리고 동네 친구들이 굶어 죽는 걸 봤습니다. 엊그제까지 같이 뛰어놀던 친구가 영양실조에 걸려서 일어나지 못하고 죽어갔어요. 가끔은 밥 굶는 친구를 집으로 데려와 부모님 몰래 밥을 먹여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누군가가 사라지면 ‘죽었다’라는 소문이 들렸고, 숱한 친구들의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길거리에서도 굶어 죽은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었죠. 고난의 행군이 한창일 때는 학교 출석률이 30%도 안 됐어요. 들판에 나와서 풀을 뜯어 먹는 어린애들도 꽤 있었습니다. 선생님들도 굶어서 출근을 못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국방종합대학

국방종합대학은 규율이 엄했다. 병영의 군인이나 다름없었다. 교내에서 강의실, 컴퓨터실을 갈 때도 개인 개별 이동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밥 먹으러 갈 때도 줄 맞춰서 행진해야 했다. 기합이 심했고, 일주일에 한 번꼴로 거품 물고 쓰러지는 친구들이 꼭 있었다.

“군사 강국을 만드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는 기관 가운데 하나가 국방대학교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학생들은 다들 굉장한 자부심과 충성심을 가지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었구나’라고 제 기존의 세계관이 뒤집히는 계기가 있었어요. 충성했던 만큼 어마어마한 증오와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졸업할 때 완전히 깨달았고, 의심은 3학년 때부터 했습니다. 제가 3학년쯤부터 학생 간부를 했어요. 그걸 하면서 그 체제가 돌아가는 원리, 북한 체제가 어떻게 북한의 주민들을 통제하고 조직을 관리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 북한은 대학생도 군사 편제처럼 관리하죠?

“네. 제가 관리하던 중대 인원이 80명이었습니다. 그 80명하고 24시간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는데, 이 학생들에 대해서 보위부 담당자가 저보다 더 많이 아는 겁니다. 내밀한 사생활까지 모조리요. 저에 대해서도 깜짝 놀랄 정도로 잘 아는 거예요. 등골이 오싹했죠. 그래서 그 사람하고 친해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척지면 안 될 것 같았으니까요.”

- 보위부가 그걸 안다는 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친해진 다음에 물어봤죠. 그랬더니 끄나풀, 스파이가 있다고 알려주더군요. 그게 누구인지는 말 안 해주고요. 계속 물어보니까 나중에 얘기해주는데 일반 학생 중에 8명 정도가 스파이였습니다.”

순진하고 착해서 전혀 스파이일 거라고 생각도 못 했던 친구도 밀고자 중 하나였다. 10명이 넘는 학생 간부는 다 보위부와 협조하고 있었다.

“저보고 누구는 어떠냐고 묻기에 ‘사상도 좋고 조직 생활도 열심히 하는 친구’라고 대답했더니 바로 그러는 겁니다. ‘너 잘못 알고 있다. 이 친구가 어떤 어떤 장소에서 어느 날 이러저러한 얘기한 것을 알고 있는가?’ 소름 돋았죠.”

김정일 논문 읽고 북 체제 모순 직시하게 돼

김정일의 논문 〈사회주의는 과학이다〉

그래서 김정일이 썼다는 논문 두 편을 읽었다. <사회주의는 과학이다>와 <사회주의에 대한 해방은 허용될 수 없다>.

“이 논문의 요지가 뭐냐? 외부 세계에서 사회주의 시스템을 분석해 사회주의는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잘못된 사회 제도라고 비판한다. 그래서 그 점을 하나하나 김정일이 조목조목 반박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 머리로는 김정일의 반박이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오히려 외부 세계에서 말하는 것이 맞는 겁니다. 예를 들어 외부 세계에서 ‘사회주의는 전체주의다’, 최민희 위원장이 얘기한 것처럼 전체주의라고 비판하고 사회주의는 병영식 주민 통제, 강제력이 큰 행정명령으로 나라를 운영한다고 했는데 제 경험에 비춰보면 다 맞는 얘기였어요.”

의심이 커지니 스스로 사상 통제가 어려웠다. 논문 속의 사회주의 비판자들은 국가를 운영하려면 다당제가 맞고 일당제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니 조선노동당의 무능함이 여실히 보였습니다. 그럼 누가 견제할 거냐? 견제할 다른 정당이 없잖아요. 근데 다당제는 서로 견제하니까 국민 지지를 얻기 위해 더 좋은 정책을 내놓을 거 아닙니까?”

자본주의 경제는 잘못됐다고 배웠지만 청년 박충권이 보기에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가 더 문제였다.

“제가 보기에 시장 경제가 맞더라고요. 국가가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계획합니까? 제가 내일 아침 뭐 먹고 싶은지 뭘 입고 싶은지 어떻게 알죠? 그걸 어떻게든 알아낸다고 해도, 제때 제시간에 물건을 생산하고 배급하는 일이 가능한가요? 깊게 생각해봐도, 단순 논리로 봐도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익 자유주의자’가 되다

당시에 공부했던 경영학도 이런 확신에 배경지식을 제공했다.

“어떤 제조업 회사를 하나 만든다고 하면, 제가 배운 교과서에는 관리직이 15%를 넘어가면 안 된다고 나옵니다.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어렵다는 것이죠. 근데 북한은 거의 80% 이상이 관리직이에요. 그리고 생산직은 다 시장에 나가 있어요. 장마당에 나가서 돈 버느라고요. 그럼 이건 망한 사회죠.”

그때부터 의심이 커지기 시작했다. 의심이 생기면 의문이 풀릴 때까지 파고드는 기질도 사상적 각성에 일조했다.

“대학교 졸업할 때 저는 우익 자유주의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그 반대로 가기는 참 어렵잖아요? 내가 속한 체제나 진영에 어떤 잘못이 발생했다고 해서 이걸 버리고 전향(轉向)하는 건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알을 깨고 나오는 건 누구에게나 쉽지 않다. 그래서 세운 논리가 있다. ‘사회가 아무리 썩어도 김씨 일가만은 잘못되지 않을 거다. 김씨 일가를 바로 밑에서 보좌하는 조선노동당 중앙당도 건재할 거다. 부패하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렇게 믿고 싶었던 거죠. 그런데 나중에 북한 사회는 제일 위에서부터 속속들이 다 부패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북에선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습니다. 대학교 졸업할 때 조선노동당 중앙당에서 저희 학교 졸업생들을 배치하죠. 근데 실력과 성적, 인성이 아니라 뇌물 액수에 따라 직장을 정해주더군요. 평양에 배치해 주겠다며 3000달러를 달라더군요. 심지어 그 돈도 간부들하고 연결된 애첩(愛妾)에게 주면 된다는 거예요. 조선노동당 중앙당이 썩었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그때 확인한 거죠. 젊은 혈기와 정의감에 불타던 세계관이 완전히 뒤집힌 겁니다.”

한국 드라마 통해 외부 세계 발견

탈북민들과 얘기해 보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다. 북한 사회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 결정적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시점부터 ‘이 사회에서 벗어나야겠다’라고 결심하기까지는 또 다른 차원의 결단이 필요하다. 목숨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인데 절대선(絶對善)이고 정의라고 믿었던 세상이 악(惡)이라는 걸 확인했잖아요. 그러니까 꿈과 희망이 다 사라진 겁니다. 그리고 그 증오와 분노, 배신감 때문에 정말 김씨 일가를 테러하고 싶은 그런 마음까지도 들었죠. 그런데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고”

자존감이 떨어졌다. 스스로가 한 톨 모래알 같은 무기력한 존재라고 느꼈다. 한 달 정도 좌절감에 빠져 살다 논리(論理)를 세워 빠져나왔다.

“젊은 청년에겐 꿈과 희망을 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요. 북한은 지구상에서 유일한 선과 정의의 국가가 자기들이라고 선전하죠. 그 외에는 다 악이라고 가르쳐요. 근데 제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악인 걸 확인했잖아요. 공학도적인 로직에서 그렇다면 이 바깥에는 정의와 선을 지닌 국가 또한 있지 않을까, 이런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바깥세상으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정보를 수집하다 보니 ‘나가야 한다, 나가면 뭔가 할 수 있겠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국 드라마도 찾아서 보고, 외부 세계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세상일까 그런 것부터 일단 확인했죠. 닥치는 대로 정보를 수집해 연구하듯 영상물을 봤어요. 제가 딱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한국과 미국, 일본의 드라마였습니다. 북한이 제일 증오하는 국가니까 이건 무조건 봐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박충권 의원에게 한국 사정을 알게 해준 SBS 시트콤 〈형사〉.

“북한 정권이 코너에 몰려 있다는 방증”

- 기억나는 드라마가 있습니까.

“<형사>(2003~2004년)라는 SBS 시트콤을 기억합니다. 시청률이 얼마 안 나온 드라마인데, 그걸 보고 ‘야,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어떤 점에서 그렇게 느꼈습니까.

“그냥 전부 다입니다. 사람들이 너무 자유롭고, 대화도 전혀 거리낌 없고 북한 사람들은 무슨 말 한마디 할 때도 조심해야 하는데 그런 게 없는 거예요.”

케이팝 노래도 300곡 정도 찾아서 들었다. 가사에 영어가 섞여 있는 것이 충격이었다. 북한 노래는 하나같이 체제 찬양 일변도인데 남쪽 노래는 엄청나게 세련된 데다 노래 안에 인생이, 삶이 담겨 있었다.

“사소한 것 같지만, 북 주민을 변화시키는 데는 이런 것들이 중요합니다.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나 케이팝이나 이런 것들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곳이 어딘지 아세요?”

- 보위부 아닐까요? 단속하고 통제하는 부서니까 자료가 제일 많겠죠.

“맞습니다. 보위부에서 한류(韓流)를 제일 많이 봅니다.”

7월 10일 TV조선은 정부 당국 관계자의 말을 인용 ‘(대북) 풍선에서 USB를 주워 드라마를 보다 적발된 중학생 30여 명이 지난주 공개 총살된 것으로 파악됐다’라고 보도했다.

“정말 반인륜적인 체제이고, 상식과 통념이 통하지 않는 사회라는 걸 증명한 사례입니다. 김씨 일가가 북한 주민들을 얼마나 사람 취급하지 않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줬죠. 그들에게 북 주민은 노예이자 짐승일 뿐입니다. 한편으로는, 그 정도로 잔인한 일을 저지를 수밖에 없을 만큼 북한 정권이 코너에 몰려 있다는 방증도 됩니다.”

“북한 주민 의식 변화 중심에 K-콘텐츠 있어”

김정은은 작년 12월 말 열린 당 전원회의에서 ‘대남(對南) 노선의 근본적인 전환’을 천명했다. 그는 “남한의 대결 책동으로 북남 관계가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고착됐다”고 했다. 화해와 협력을 통한 통일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남반부를 평정하려는 군대의 보조 역량으로 대남 사업 부문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대남 무력(武力) 통일 노선을 노골화한 것이다. 이 발언 역시 코너에 몰렸기에 나온 것일까?

“저는 북한 내부 사정이 좋지 않을 것이라 판단합니다. 그것이 공격적인 발언이 나온 원인이라 생각하죠. 김정은도 다 알아요. 북한 주민들의 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변했고, 반인륜적인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주민들을 통제하기가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을 말이죠. 그래서 내부 위기의식을 끌어올리느라고 강성 발언을 하는 것이라 봅니다. 한국을 동족이 아니라 최대 주적(主敵)으로 만들어서, 북한 주민의 마음속에서 한국에 대한 선망과 동경을 제거하려는 것이 목적일 겁니다.”

- 엄청난 폭력을 동원해야 북 주민의 대남 동경을 가까스로 막을 수 있다는 뜻이군요. 북한 주민이 왜 이렇게 바뀐 겁니까.

“이 의식 변화의 중심에 K-콘텐츠가 있습니다.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오빠 금지법’이라고 하죠. 역대 유례가 없는 3대 악법(반동사상문화배격법, 평양문화어보존법, 청년교양보장법)을 만들었잖아요? 이 법들에 따라, 한류를 접하거나 소지하거나 심지어는 남쪽 말을 쓰면 10년 노동교화형부터 총살에 이르기까지 엄벌이 가능합니다. 한류가 얼마나 퍼졌으면 그리고 얼마나 두려우면 이렇게까지 나오겠습니까?”

“적화통일 야망까지 포기한 것 아니다”

- 일각에서는 김정은의 이런 선언을 두고 ‘남조선 해방, 적화통일을 목표로 인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정권 정통성의 근거로 삼아온 스스로의 존립 근거를 무너뜨린 것이다, 북한 정권은 이제 끝장났다’라고 주장합니다.

“북한 정권이 위태롭고,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부분에는 깊이 공감합니다. 하지만 적화통일 야망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죠. 김일성·김정일 시대의 최종 목표는 한반도의 공산주의화, 나아가 전 세계의 공산주의화였습니다. 북은 이 목표를 공식적으로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다만, 이 과대망상에 불과한 최종 목표를 주장하고 밀고 나가기에는 현재 북한의 상황이 너무 위태롭고 보잘것없습니다. 이미 의식이 크게 변화했고, 특히 한국을 동경하는 북한 주민에게 이러한 목표를 내세우는 것은 역효과를 발생시킬 겁니다. 확실해요.”

박 의원의 말처럼, 필자 역시 김정은의 호전성(好戰性)을 경계해야 한다고 본다. 김씨 일가는 남조선 혁명 방식의 적화통일을 포기한 것이지,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까지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맞습니다. 하지만 북은 적화통일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능력이 턱없이 부족해요. 만약에 북한 체제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는 위급한 상황이라면, 그때는 적화통일을 하나의 옵션으로 고려할 수도 있을 겁니다.”

박충권 의원은 북한 정권에 가장 치명적인 위협은 한국의 선진 문화, 앞선 경제, 국제적 위상 등이라고 단언했다. 그 자신이 탈세뇌(脫洗腦)한 경로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족 브로커

그는 탈북을 결심한 뒤 1년 8개월을 준비했고, 두만강을 넘어선 지 사흘 만에 인천항을 통해 대한민국에 왔다.

“4월 10일이 제가 두만강을 건넌 날이에요. 그리고 4월 13일이 제가 인천항에 들어온 날입니다. 공교롭게도 4월 10일이 이번에 총선일이었죠. 초심을 잃지 않는 데는 이만한 우연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 두만강을 건널 때의 심정이 어땠습니까.

“새로운 땅으로 간다는 희망도 있었지만 굉장히 허무했고 슬펐습니다. 내가 이뤄놓은 모든 걸 다 버리고,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었으니까요. 심지어는 제 목숨도요.”

이제 내가 태어난 고향은 없구나, 미래도 너무 불투명하고, 과연 살아서 한국에 도착할 수는 있을지 이런 막막한 심정이었는데 정신적 투지에 불을 댕긴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족 브로커가 저를 굉장히 무시하는 거예요. 서러웠죠. ‘내가 중국의 조선족 브로커마저도 대놓고 무시하는, 이렇게 보잘것없는 나라에서 태어났구나.’ 그런데 그 조선족 브로커가 대한민국을 엄청 칭찬하는 겁니다. ‘너무 살기 좋은 나라’라고, ‘중국 사람들도 가서 일하고 싶어 하는 나라’라고.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텅 빈 마음이 채워졌습니다. ‘그래, 이제부터 내 조국은 대한민국이다. 내 동족의 나라다. 또 다른 나의 조국이다. 무조건 살아서 내 눈으로 한번 그 땅을 확인해 봐야겠다. 죽더라도 한번 가보고 죽자’ 이런 생각으로 넘어왔습니다.”

서울대학교

인천항에서 내려 경찰을 찾아가 북에서 왔다고 했다. 경찰은 아주 친절했다. 국정원에선 아들처럼 챙겨주시는 분을 만났다. 이 밖에도 대한민국의 제도적 혜택을 많이 받았고 그래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하나원 안에서 대한민국 생활에 대한 설계를 어떻게 했습니까.

“사실 대한민국 생활의 설계는 미리 북한에서 다 했습니다. 새로운 세상으로 가잖아요. 뭘 할 것인지를 구상하면서 옵션 3개를 만들었습니다. 첫 번째는 국정원에서 일하면서 북한 체제를 뒤집는 일을 한다. 두 번째는 대학교를 간다. 새로운 세상에 가서 적응하려면 저에게는 가장 빠른 루트가 공부하는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세 번째가 군(軍)에서 일하면서 조국 통일을 위해 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병무청에선 면제 대상자라고 했고, 국정원에서 일하기엔 경력이 모자랐다. 그래서 《로동신문》에서 본 ‘서울대학교가 한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기사를 기억하고 목표로 잡았다. 남조선 최고의 대학교라는 서울대학교의 모 교수가 김정일 장군님을 찬양하는 뭔가를 했다는 식의 기사였다.

“《로동신문》에는 항상 대남 섹션이 있어요. 한국을 비방하는 난이죠. 소고기 파동, 이런 걸 비방하는 건데 그 기사를 보면서 든 생각이 있었어요. ‘저거 먹더라도 광우병은 30년 뒤에 걸린다는데, 이걸 가지고 저렇게 시위를 하나?’ 여기 사람들은 아예 먹을 것이 없어서 못 먹는 상황인데 말입니다. 북에선 상한 음식이라도 다 먹습니다. 오늘 먹고 내일 죽는다 해도 먹어요. 어차피 굶어 죽으니까. 그래서 그 기사를 읽고 ‘남북 생활 수준의 차이가 너무 크구나’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서울대에선 인턴으로 받아줬다. 일주일에 두 번 출근하고 한 달에 140만원씩 줬다. 나와서 선배들 실험 좀 도와주고 남는 시간에 공부해도 된다고 했다. 너무 좋은 일자리란 생각이 들었다. 매일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장학금 받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탈북민이자 MZ 세대”

7년째 관악에서 머물 무렵 고맙게도 당진 현대제철에서 입사 제의를 해왔다. 알뜰하게 챙겨준 센터장님을 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정치엔 어떻게 입문하게 된 걸까?

“정치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다만 평소에 정치에 대한 관심은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죠. 그래서 통일비전연구회, 블루프린트 코리아, 모자이크 코리아와 같은 여러 모임을 가졌습니다. ‘언젠가 북한 정권을 갈아엎어 버리겠다’라는 목표를 가지고 한국에 왔으니까, 이런 삶의 배경 때문인지 계속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겁니다. 2017년 무렵에는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안보가 큰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껴 《조선일보》에 칼럼도 썼어요. 그러다가 한때는 정치 현실에 너무 실망해 아예 정치 뉴스에 귀를 닫아버리고 살기도 했죠. 그러던 와중에 이번 총선에서 당의 인재 영입 제안을 받고 입문했습니다.”

비례대표 제안을 받았을 때는 좀 많이 놀랐다고 한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서다.

- 당선되었을 때 ‘어머니께 이 소식을 알릴 수 있으면 참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요즘 와서 그런 생각을 가끔 합니다. 초반에는 제가 정치 신인이라 아무것도 몰라서, 또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 압박감, 중압감 이런 것 때문에 그런 생각을 못 했어요. 어떻게 하면 더 잘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세비가 아깝지 않다는 평가를 받을까, 이런 고민을 계속했습니다.”

- 정치인으로서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저는 탈북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제 나이 또래 MZ 세대들과 비슷한 고민을 하면서 살아온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취업난도 겪어봤고, 결혼이라는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고, 집을 하나 장만하는 것도 간단치 않고 이런 어려움들을 다 겪으면서 살아온 한 사람의 청년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습니다.”

“고위층 탈북 꾸준히 이어질 것”

- 북한 문제는요?

“저는 북한 체제가 잘못된 걸 깨닫고 이걸 바꿔보려는 꿈을 가지고 탈북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더 좋은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더 나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기여하겠다는 꿈이 있습니다. 이것이 통일로 가는 고속도로니까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서 성장한 사람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또 하나, 이공계인으로서 대한민국이 과학 기술 강국으로 도약하는 길을 닦고 싶습니다. 과학 기술이 한 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결정하는 기술 주권 시대니까요.”

그는 인터뷰 내내 북한 체제의 모순과 한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최근 북한 엘리트들의 탈북이 이어지는 것도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단순히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 아니라, 북한 체제를 지탱해 온 가치를 부정하게 된 데서 온 충격이 원인인 것은 혹시 아닐까?

“최근 유학생, 외교관 등, 북한 엘리트층의 탈북이 늘어나는 추세죠. 북한 체제의 핵심 가치가 국내외에서 부정당하는 건, 그리고 그걸 알고 확인한 뒤의 심경 변화의 고뇌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정말 충격이 커요. 그런데다 북한의 미래가 암담하다는 건 더 이상 비밀도 아니죠. 과거 대비 외부 정보 유입이 증가하고, 북한 체제의 본질을 깨닫는 엘리트가 증가하는 만큼 고위층 탈북은 꾸준하게 이어질 것으로 봅니다.”

박 의원에 따르면, 중년 이상의 엘리트들은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 탈북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필자는 태영호 민주평통 사무처장(전 의원)도 그런 경우라고 본다. 직계가족이 남아 있어 누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기의 꿈을 얘기하니 북 고위층인 아버지가 ‘탈북해서 홍대에 진학하라’라고 조언했다는 탈북자도 있다.

“김주애, 후계자 단정 일러”

- 그럼 북한은 곧 무너지나요? 김주애의 후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붕괴 여부는 제가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요, 다만 김주애 문제는 탈북민으로서 말씀드리자면, 승계 가능성은 있으나 아직 후계자라 단정하기에는 이른 면이 있다고 봅니다. 북은 여전히 문화가 낙후해 있고, 가부장적(家父長的) 분위기가 강해요. 여성 지도자? 인정하기 어려울 겁니다. 또 하나, 북한은 역대로 진짜 후계자를 마지막 순간까지 오픈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김주애의 잦은 등장은 후계 구도 작업이라기보다는 민심 이반을 완화하기 위한 쇼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정은의 폭군 이미지를 완화하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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