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46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옆에서 웃고 있는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 /유튜브

한반도의 진정한 분단 세력은 누구일까?

지난 19일 한평생 “민족 통일”만 부르짖던 임종석 전(前) 전대협 의장이자 대통령 비서실장이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의 “반통일 2 국가 선언”에 동조하여 “통일 하지 말자”고 발언했다. 2023년 12월 말 김정은이 “미국의 식민지 졸개에 불과한 괴이한 족속”과는 “통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지 열 달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김정은의 도발적 선언에 대응하여 2024년 신년 벽두 “슬픈 중국” 첫 칼럼은 “노예제 국가 북한에 팽(烹)당한 남한 ‘86′세대 운동권”이 나갔다. 이 칼럼은 우선 1인당 GDP가 3만 달러를 훌쩍 넘은 최첨단 산업 대국 대한민국을 미국의 식민지 졸개라 부르는 김정은의 언어도단을 비판한 뒤, 오늘날 북한이 인구의 10%를 노예로 삼은 세계 최악의 노예제 국가라는 국제 인권 단체 “워크 프리(Walk Free)”의 보고서를 소개하고, 나아가 김정은에게 버림받은 남한 “86세대” 과거 주사파 운동권이 당면한 이념적·정치적 딜레마를 지적했다.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통일 포기 선언으로 지난 30여년 북한과 어우러져 “우리민족끼리”를 불러왔던 역대 정권의 수장들과 통일운동 세력은 순식간에 이념적으로 파산했다. 분식 회계로 다 쓰러진 회사를 이어가다 동업자의 배신으로 부도를 맞은 꼴이랄까. 그동안 남한의 좌익 민족해방(NL) 세력은 김정은의 “반통일 2 국가 선언”에 대해 말을 아껴왔는데, 급기야 지난 목요일 그 세력의 좌장 격인 임종석이 김정은의 선언에 노골적으로 동조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그가 내세우는 명분은 다름 아닌 “평화”였다. 그는 평화를 위해서라면 통일을 먼 후세로 무한정 미룰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입만 열면 민족 통일을 외치던 그의 머릿속을 이제 “통일=전쟁”, “분단=평화”라는 새로운 등식이 점령한 듯하다. 졸지에 김정은이 평화를 수호하는 수령을 자처하고, 남한의 종북 세력은 그 수령의 교시를 떠받드는 평화의 파수꾼을 자임하는 부조리가 펼쳐졌다.

임종석 전 “2018 남북정상회담” 준비위원장이 지난 19일 오후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열린 9·19평양공동선언 6주년 광주 평화회의 '평화, 가야 할 그날' 행사에 참여해 기념사하고 있다. /조선일보 DB

지난 74년 북한은 끊임없이 한반도 평화를 파괴하고 위협하는 군사 도발을 저질러 왔다. 불과 열흘 전 기폭장치를 단 오물 풍선을 남으로 날려 보내 방화 테러를 가한 주체도 바로 북한의 김씨 왕조이다. 그러한 북한의 실체를 아는지 모르는지 “반통일 2 국가”라 외쳐대는 북한 김정은의 선창에 남한의 종북세력은 “평화 수호”란 추임새를 붙이고 있다. 왜 하필 임종석의 입에서 통일을 하지 말자는 주장이 나왔을까?

보통 시민들이 느끼기에 어리둥절할 수 있지만, 그런 주장의 뿌리는 실상 1980년대 남한 지식계에 들불처럼 번졌던 반미주의(anti-Americanism)에 놓여 있다. 당시 반미 세력은 미국이 핵무기로 북한을 위협하며 전쟁을 일으키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조선노동당 선전부가 바로 그런 관점에서 북한의 핵무장은 미국발 전쟁을 억지하려는 “위대한 수령”의 결단이라 선전해 왔다. 결국 “통일=전쟁,” “분단=평화”라는 임종석의 주장은 미국과 대한민국 정통 세력을 전쟁광쯤으로 매도해 온 북한식 정치선전의 재판에 불과하다.


“안보 상업주의”인가, 안보 불감증인가?

지난 반세기 대한민국의 소위 “진보” 지식인들은 안보 공포를 조장해서 정치권력을 강화하는 과거 군사정권의 “안보 상업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해 왔다. 휴전선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거나 동해안에 무장 공비가 출현할 때면 그들은 군사정권이 대중적 공포를 조장하기 위해서 악마화한 북한을 악용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선거 전후해서 벌어지는 안보 위기는 군사정권의 자작극이라는 의심을 샀다. 안보 사건이 터질 때마다 거센 음모론이 일었다.

대표적 사례가 1987년 11월 29일 인도양 미얀마 상공에서 터진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이었다. 불과 17일 후인 1987년 12월 16일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돼 있던 시점이었다. 선거 하루 전날인 12월 15일 체포된 범인 김현희가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장면이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그 사건은 분명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쳤고, 결과에 낙담한 세력은 두고두고 이 사건을 안기부의 자작극이라 여겼다.

1987년 11월 29 북한의 공작원들에 의해 폭파된 대한항공 858기의 잔해. /공공부문

결국 2004년 노무현 정권하에서 발족한 ‘국정원 과거 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3년에 걸쳐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했다. 음모론자들의 주장처럼 그 엄청난 사건이 안기부 자작극이었다면, 소위 “보수세력”은 멸절을 면치 못했겠지만, 조사위는 2007년 10월 “KAL기 폭파 사건이 북한에 의해 자행된 사건이며, 그동안 제기돼 온 ‘안기부 조작설’ 등 의혹은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전혀 없다”고 밝혔다.

1987년 대한항공 858 폭파 사건은 선거를 앞두고 정권을 재창출하려는 전두환 정권의 자작극이 아니라 김일성 정권의 군사 테러라는 사실이 전두환 정권을 가장 미워했던 대한민국 진보 세력의 자체 조사를 통해 재확인된 것이다. 115명의 인명을 앗아간 폭탄 테러는 전두환 정권이 아니라 김일성 정권의 무력도발이었다. 다시 말해, 그 참혹한 테러 사건은 남한의 안보 상업주의가 빚어낸 정치적 환상이 아니라 북한의 대남 적화 노선에 따른 명백한 군사적 만행이었다.

대한민국 헌정사의 모든 국면마다 북한의 군사 도발이 끊이지 않았다. 북한의 김씨 왕조는 민족해방의 깃발을 들고 625남침을 자행했으며 대남 적화 노선을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서 무력도발과 이념전쟁을 벌여왔다. 이미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44회에서 소개했지만, 1975년 사이공 함락을 목전에 두고 흥분하여 베이징으로 달려간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향해 한반도 통일을 지원해 달라고 간청했다. 1975년 4월 19일 김일성은 베이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인민이 지금도 갈라진 조국의 통일을 위해 전개하는 작금의 투쟁은 전 지구적 반제 민족해방 투쟁의 체인에서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입니다. 남조선에서 혁명이 발생한다면 같은 나라의 성원으로서 우리는 그저 팔짱만 끼고 방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남조선 민중을 힘을 다해 지원할 것입니다. 적대세력이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키면, 우리는 더욱 견결하게 응전하여 침략자를 완전히 깨부술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우리가 잃을 것이라곤 군사분계선밖에 없지만, 얻을 것은 조국의 통일입니다.”(Shen Zhihua, A Misunderstood Relationship, Columbia Univ. Press, 2020; 沈志華, ‘最後的天朝,’ 香港中文大學出版社, 2018)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부탁을 거절했다. 두 달 후 (1975년 6월 2~5일) 불가리아를 방문하여 지프코프(Todor Zhivkov, 1911-1998) 공산당 서기장을 만난 김일성은 북한이 당시 대한민국의 제1야당 신민당과 모종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나아가 사회주의 성향의 반체제적 지하 정치세력을 적극적으로 지도하고 있다는 발언까지 남겼다.

1970년대부터 김일성이 대규모 대남 침략을 시도했으며, 1980년대부터 2010년까지 대규모 군사 테러를 자행했다는 사실은 북한의 대남 군사 위협이 현존하는 실제 위협이란 사실을 넉넉히 증명한다.


“반전반핵 양키고홈!”에서 “반통일 2 국가”로

1980년대 중반부터 남한의 대학가에 북한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역병처럼 거침없이 퍼져나갔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남북한 군사 긴장의 책임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의 “독재 정권”에 있다는 북한 선전부의 선전·선동이 큰 효력을 발휘했다. 지식계에 미국발 수정주의가 득세하면서 6·25전쟁도 “미(美)제국주의자들과 이승만 괴뢰도당”의 책임이라는 뒤틀리고 비뚤어진 역사의식이 만연했다. 여순반란을 민족해방 투쟁이자 통일전쟁으로 미화한 ‘태백산맥’ 같은 소설이 수만 질씩 팔리던 시절이었다.

1989년 제3기 전대협 의장 임종석을 환영하는 충북대 대자보. 당시 주사파 운동권은 북한의 수령론에 따라서 학생 대표에게 극존칭을 사용했다. /유튜브

그때 한국의 지식계엔 이념적 착란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조선노동당 선전부의 정치전이 대한민국 문교부의 공교육을 완전히 압도하던 시절이었다. 대학가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서 공산 진영이 선의 세력이고 자유 진영을 악의 세력이라 굳게 믿는 집단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났다. 반역의 세월, 그들은 주체사상을 신봉하며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외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노동당 선전부가 펼치는 정치전의 포로가 되어 거짓으로 환상의 산을 쌓아 올렸다.

1980년 중후반부터 대한민국의 좌익 운동권 세력은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쳐댔다. 미국이 핵무기로 북한을 위협하며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북한식 선전술이 한국의 대학가에 여과 없이 침투했음을 보여준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소위 “진보 세력” 중에는 그 시절 그 낡은 생각을 그대로 견지하는 집단이 건재한 듯하다. “우리민족끼리”의 깃발을 흔들며 민족 통일을 지상 명령이라 외치던 북한의 김씨 왕조와 남한의 좌익 세력이 뜬금없이 의기투합하여 “반통일 2 국가”를 외쳐대는 작금의 상황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만 독립의 논리를 훔치려는 김정은의 언어도단

김정은이 제창한 “반통일 2 국가 선언”은 일면 “대독(臺獨, 대만 독립)”의 논리 구조를 차용하고 있다. 첫째, 대만의 라이칭더는 2024년 5월 20일 취임사에서 “중화민국 대만은 독립적인 주권 국가”이며,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서로 예속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표면적으로 김정은도 통일 포기를 선언하고 한반도 “2 국가”를 선언했다. 둘째, 대만은 통일을 부르짖는 중국의 군사 위협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지난 반세기 김씨 왕조는 북한이 마치 대만처럼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미국의 막강한 군사 위협에 맞서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셋째, 대만은 독립의 당위를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중국의 정치체제가 비인도적 전체주의라는 점을 들고 있다. 마찬가지로 북한은 독자노선의 명분으로 “미국의 졸개에 불과한 괴이한 족속”이라 대한민국 체제를 맹비난한다.

2024년 5월 20일 라이칭더 대만 총통 취임식 연설 장면. 라이칭더 총통은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서로 예속되지 않는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유튜브

그 점에서 김정은의 “반통일 2 국가 선언”은 북한을 독립적 주권국으로 인정해 달라는 수세적 절규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문제는 형식논리 면에서 유사성이 있을 뿐 대만과 북한이 처한 실제 상황은 원천적으로 양국의 비교를 불허한다. 대만은 전 국민에게 보편적 인권과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투명한 직접 선거로 민주적 권력을 창출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이다. 아울러 대만은 전 세계 반도체의 60% 이상을 위탁 생산하는 최첨단 산업국이며, 서태평양 제1도련선 핵심에 놓인 자유민주적 국제질서의 전초기지이다.

반면 북한은 극단적 고립 노선으로 극빈의 늪에 빠진 최악의 인권유린국일뿐더러 핵무장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직접 위협하는 전체주의적 세습 정권에 불과하다. 김정은은 대만식 독립의 논리로 엉켜버린 “주체” 노선의 실타래를 풀어보려 하지만, 국제 사회에서 북한 노선을 지지하는 국가는 북한의 현상을 그대로 남겨두려는 중국과 러시아밖엔 없다. 그나마 최근에 김정은이 러시아에 붙으려 하자 중국은 북한 길들이기에 나선 형국이다.

요컨대 대만의 현상 유지는 자유, 인권, 법치, 평화, 경제적 안정을 유지하려는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기본 전략이다. 반면 북한의 현상 유지는 반자유적 인권유린, 반민주적 폭압 통치, 전제적 세습 지배를 영속하려는 전체주의 세력의 지배 전략이다. 현 상태 그대로 대만과의 공존은 진정한 세계 평화를 보장한다. 반면 북한과의 공존은 김씨 왕조만 존속시켜 주는 위장 평화만 조장한다. 지금의 대만은 전 세계에 꼭 필요한 자유민주적 모범국가(model state)이지만, 오늘날 북한은 전 세계에 외면당하는 전체주의적 불량국가(rogue state)이기 때문이다.

임종석은 왜 갑자기 작금의 상황에서 통일하지 말고 평화를 지키자고 외쳐대고 있을까? 김씨 왕조의 급변 사태로 한반도에 불쑥 통일이 찾아올까 두렵기 때문일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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