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5박 6일간의 필리핀·싱가포르·라오스 3국 순방을 마치고 11일 저녁 귀국했다. 윤 대통령은 이번 동남아 순방에서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하고 이시바 시게루 일본 신임 총리와 첫 양자 정상회담을 했다. 싱가포르와는 ‘물류 동맹’도 구축했다.
하지만 귀국한 윤 대통령이 마주한 국내 정치 현안은 녹록지 않다. 순방 기간 더불어민주당은 국회 국정감사에서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을 집중 제기하며 상설 특검과 개별 특검 병행 추진에 나서는 등 전방위 공세를 펼쳤다. 윤 대통령 부부와 친분을 주장하는 명태균씨를 둘러싼 논란도 확산했다. 이런 가운데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도 ‘김 여사 리스크’ 해소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왔다.
정치권의 관심은 윤 대통령과 한 대표의 독대(獨對)로 모이고 있다. 앞서 한 대표는 지난달 24일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도부 만찬에 참석한 직후 독대를 거듭 요청했는데, 대통령실은 그로부터 보름 뒤인 지난 9일 “10·16 재·보선 이후 독대가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한 대표는 지난 9일 “김 여사의 활동 자제가 필요하다”고 한 데 이어 10일에는 김 여사의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연루 의혹과 관련해 “검찰이 국민이 납득할 만한 결과를 내놔야 한다”며 대통령실을 압박하는 듯한 발언을 잇달아 내놓았다.
친윤계에선 “한 대표가 사실상 ‘김 여사를 기소해야 한다’는 뜻을 밝힌 것”이라며 반발했다.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을 지낸 강승규 의원은 이날 “법무부 장관을 지낸 여당 대표가 국민의 감정에 따라서 여론 재판을 하라는 것이냐”고 했고, 친윤계 박대출 의원은 “탄핵의 교훈을 잊었느냐. 분열은 공멸”이라고 했다.
한 대표는 윤 대통령과 독대하면 김 여사의 활동 자제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등과 관련해 국민 눈높이에 맞는 조치를 건의할 생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윤·한 두 사람 독대가 또다시 무산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여권 일각에서 나왔다. 윤상현 의원은 본지 통화에서 “한 대표 발언은 야당 대표나 할 말”이라며 “한 대표가 이런 발언을 계속하면 독대를 깨려는 것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고 했다.
여권에선 “김 여사를 고리로 한 야권의 탄핵 공세가 총력전 양상으로 치닫는 등 정국이 위중하기 때문에 윤·한 두 사람 독대는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한 친윤계 핵심 의원은 “친윤계 인사들도 사석에선 ‘김 여사 리스크’를 해소해야 한다는 걱정을 토로하기 시작했다”며 “윤·한 두 사람의 독대가 성사돼 돌파구를 마련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 대표가 이날 서울공항에 윤 대통령 마중을 나간 것도 독대 의지를 나타낸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한 대표는 지난 6일 윤 대통령 출국길 환송에는 부산 금정구청장 보궐선거 지원 유세 등을 이유로 불참했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7시 30분쯤 김 여사의 손을 잡고 공군 1호기에서 내려 한 대표, 추경호 원내대표, 대통령실 정진석 비서실장 등과 차례로 악수한 뒤 차량을 타고 이동했다.
윤·한 독대의 관건은 한 대표가 제시하는 김 여사 문제 해법을 윤 대통령이 어느 정도 수용할 수 있을지가 꼽힌다. 윤 대통령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김 여사에 대해 제기되는 각종 의혹과 특검 요구는 ‘정치 공세’라고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은 지난 5월 취임 2년 기자회견에서 “(도이치모터스) 특검 문제도 사실 지난 정부 2년 반 정도는 사실상 저를 타깃으로 해서 검찰에서 특수부까지 동원해서 치열하게 수사를 했다”고 했다.
하지만 친한계는 물론 친윤계 일각에서도 김 여사 리스크와 관련한 우려가 커지는 것은 윤 대통령에게 고민거리다. 의정(醫政) 갈등이 장기화하고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 지지율이 취임 후 최저치를 기록한 것도 윤 대통령으로선 부담이다. 여권 관계자는 “윤 대통령은 여권 진영의 다양한 우려에 대한 인내심을, 한 대표는 윤 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는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가 시험대에 올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