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50회>
사춘기 시절 인간은 누구나 질풍노도의 성장통을 앓으며 인생의 깊은 의미를 깨달아간다. 국가 공동체의 진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장구한 역사의 과정에서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실패와 패배를 거울삼아야만 비로소 공동체적 지혜와 범시민적 합리성을 발휘할 수가 있다.
제국주의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무기력하게 나라를 잃고 피식민(被植民)의 오욕을 겪었던 민족이라면 더더욱 치욕스러운 과거사를 비판적으로 반성해야만 한다. 결국 벗고 거울 앞에 서는 심정으로 역사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스페인의 철학자 산타야나가 말했듯, 역사를 망각한 자는 같은 역사를 반복할 수밖에 없으니······.
고통스럽다고 회피하거나 이미 벌어진 과거사를 “원천 무효”라며 자위(自慰)한다면 진화를 멈춘 채로 이념의 갈라파고스(Galapagos)에 갇혀 버리고 만다. 역사 서술의 기본은 과거사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거짓 없이 진술하는 데에서 시작된다. 정치적 의도에 휩싸여 과거를 왜곡하는 순간, 역사는 정치적 무기로 변질되고, 인간사의 진실은 묻혀버린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국적은 과연 무엇이었나?
일제 강점기 한반도의 ‘조선인(朝鮮人, 韓人, Koreans)’은 모두 ‘일본 국민’에 편입되어 ‘일본 국적’을 부여받았다. 당시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라는 사실은 그 당시 일제가 조선인에 발급한 여권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의 입국 사증을 봐도 대번에 알 수 있다. 물론 그렇게 일본 국적을 부여받았음에도 일본의 국적법은 ‘내지(內地)’의 일본인과 한반도의 조선인에게 똑같이 적용되진 않았다.
1899년 제정된 일본 국적법 제20조는 “자기의 희망에 따라 외국 국적을 취득한 자는 일본 국적을 상실한다”고 규정했다. 이 법에 근거하여 해외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외국 국적을 취득함과 동시에 일본 국적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인들에겐 이러한 일본의 국적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해외로 나간 조선인들이 외국 국적을 취득하여 그 나라로 귀화한다고 해도 일제는 조선인의 일본 국적 이탈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다(武井義和, “戦前上海における朝鮮人の国籍問題,” 中国研究月報60[1], 7-21, 2006-01).
일제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 국적법 불이행의 근거로 “신민은 대대로 왕조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조선왕조의 관습법과 외국으로의 귀화를 금지한 대한제국 내부대신 훈령 제240조(1908년)를 들었다. 대한제국의 호적법에 준하여 조선인을 지배하겠다는 명분이었지만, 해외에 체류하며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인들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일제가 만주국(滿洲國) 세우기 이전 만주 길림(吉林) 동남부 간도(間島) 지방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의 국적과 관할권을 놓고서 중국과 일본이 맞섰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의 이중 국적 문제와 토지 소유권 논란이 발생하자 1915년 중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고에 관한, 이른바 남만동몽(南滿東蒙) 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은 만주에 체류하는 조선인을 일본 신민이라 주장하며 영사 재판권을 행사하려 하였고, 일본의 주장을 거부한 중국은 지방 관리를 통해서 만주의 조선인들을 지배하려 했다. 1920년대 말 만주 지역에 체류하던 200만 명의 조선인 중에서 대략 10%가 중국 국적을 취득했으나 일제는 그들의 일본 국적 이탈을 용납하지 않았다(이영훈, “일정기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이었다”).
1933년 제네바에서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의 승인 여부를 둘러싼 국제연맹 총회가 열렸을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은 바로 그 현장을 찾아서 조선 독립의 당위를 설파하면서 ‘만주의 한인들(The Koreans in Manchuria)’이란 소책자를 배포했다. “만주 지역 조선인의 입지를 불리하게 한다”며 국제동맹에 만주 문제를 안건으로 상정할 수 없다는 일제의 괴이한 변명을 비판하면서 이승만은 만주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조선인들까지 무조건 일본 신민으로 속박하여 절대로 일본 국적에서 이탈할 수 없게 하는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Syngman Rhee, “Statement of the Koreans in Manchuria,” Geneva, February 18, 1933).
1923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체포된 조선인의 국적 논란
만주뿐만 아니라 1920~30년대 중국의 국제도시 상하이(上海)에도 상당수 조선인이 체류하고 있었다. 상하이 일본 영사관의 조사에 따르면, 1921년 6월 말 현재 739명, 1922년 7월 말 현재 625명의 조선인이 상하이에서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중 중국으로의 귀화 신청자가 몇 퍼센트 정도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일본 측이 “요주의(要注意)” 대상으로 지목한 인물들도 적잖게 포함돼 있었다(武井義和, “戦前上海における朝鮮人の国籍問題,” 中国研究月報60[1], 7-21, 2006-01).
일례로 평안남도 중화 출신 독립운동가 한진교(韓鎭敎, 1887~1973)는 1914년 상하이로 가서 해송양행(海松洋行)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경영했던 인물이었다. 1919년 상하이에 한국임시정부가 들어선 후 그는 물밑에서 자금을 대고 여러 식객(食客)을 보살피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1923년 2월 그는 일본 지폐를 위조한 죄로 프랑스 조계에서 체포되었고, 회심(會審) 아문(衙門)으로 넘겨졌다. 1860년대 창설된 회심 아문은 중국인 재판관과 외국인 재판관이 합동으로 심리하는 상하의 조계의 중외(中外) 혼합형 재판 제도였다. 명목상 합동 재판이었지만, 중국인 피고는 중국 현행법에 따라 중국 재판소가 심의했고, 외국인 피고는 외국 재판소가 담당하는 원칙이 있었다.
당시 한진교는 이미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귀화한 상태였으므로 중국 측은 그를 중국인으로 인식했다. 이와 달리 일본 총영사관은 한진교는 일본 국적자라는 점을 근거로 1923년 3월 중국 측에 공식적으로 그의 신병 양도를 요구했다. 중국 측은 그가 이미 중국의 적법 절차에 따라서 중국 국적을 취득하여 “귀화 허가 증서”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서 일본 측의 요구를 묵살했다.
한진교의 국적을 두고 중·일의 입장이 첨예하게 부딪히자 결국 프랑스 조계가 중재하고 나섰다. 그 결과 한진교는 1923년 12월 무렵에야 프랑스 조계로 송치되어 재판받게 되었다. 프랑스 조계 재판부는 범죄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며 그를 프랑스 조계 밖으로 추방하는 선에 머물렀다. 적어도 이 시점 상하이에서는 일본 측이 중국으로 귀화한 조선인을 일본 국적자임을 내세워 자의적으로 처리할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상황은 그러나 머잖아 급변했다.
상하이의 프랑스 경찰, “안창호의 국적은 일본이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남만주 선양(瀋陽)에서 이른바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이른바 ‘15년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이듬해 1월 28일엔 상하이 국제 공동 조계에서 일본 군과 중국 군이 격돌하는 제1차 상하이 사변일 발발했다. 양국의 병력이 팽팽히 맞서면서 전투가 지연되자 일본은 2개 사단의 증원군을 파병하여 저돌적인 공격에 나섰다. 결국 3월 1일이 되자 중국군은 상하이를 버리고 후방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승전 경축의 열병식을 올리는 일본 영사와 해군 중장 등을 향해서 조선 청년 윤봉길(尹奉吉, 1908-1932)이 폭탄을 투하했다. 곧바로 4월 29일과 30일에 이틀간 일본 총영사관 경찰은 프랑스 조계 경찰의 협력 아래서 12명의 조선인 연루자를 체포했다.
그 12인 중에 도산(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가 속해 있었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내무 총장직과 국무총리직을 역임한 안창호는 1923년 7월 중국 국적을 취득해 중국으로 귀화한 상태였다. 그런 안창호가 일본 총영사관의 경찰이 체포하자 그의 국적을 둘러싸고서 중·일 양국 사이에서 다시 논쟁이 불붙었다.
상하이 여러 시민 단체는 중국에 귀화한 안창호를 중국 당국이 아니라 일본 총영사관이 잡아간 사실에 격분하여 항의했는데, 그들의 분노는 일본을 돕는 프랑스 조계를 향해 있었다. 그렇게 중국인들은 귀화한 조선인 안창호를 중국인으로 대우하며 구출하려 했다. 안창호가 체포된 5월 중순까지 중국인들은 격렬한 반일 시위를 이어갔다. 중국의 법조인들은 일본에 체포당해 있는 안창호가 중국 국적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국민당 정부를 압박했다.
특히 상하이 법조인들의 결사체인 율사공회(律師公會)는 안창호를 중국인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그들은 “중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이 동시에 원래의 국적을 상실하지 못해서 이중 국적의 문제가 발생한다면, 국제 공법의 원칙에 따라 그가 살고 있는 나라의 법률로 결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중국 국적을 취득한 조선인들은 일본 국적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중국 영토에 이미 살고 있기에 마땅히 중국인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포용의 논리였다(武井義和, 같은 논문).
중국인들의 항의에도 아랑곳없이 일본 경찰에 체포당한 안창호는 같은 해 6월 2일 조선으로 압송돼 갔다. 일본 총영사관이 안창호의 신병을 확보할 때 프랑스 조계 경찰이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무엇보다 프랑스 조계 당국이 안창호를 일본 국적자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프랑스인들의 눈에 비친 조선 출신 안창호는 설령 중국에 귀화했더라도 중국인이 아니라 실은 일본 국적에서 이탈할 수 없는 일본인이었다. 여러 식민지를 거느리고 경영하던 제국 열강은 그렇게 힘의 논리에 공조하고 있었다.
“존재(存在, sein)”와 “당위(當爲, sollen)를 구분해야
1923년 7월 안창호는 중국 국적을 취득하여 중국으로 귀화했다. 그가 일제에 체포되었을 때 상하이의 중국인들은 중국인을 잡아가지 말라며 격렬하게 시위를 벌였다. “민족개조”와 “실력양성”을 외치며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안창호는 왜 중국 국적을 취득해야만 했을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했음에도 당시의 현실에서 안창호는 국제법상 일본 국적자였다. 항일 독립투사가 일본 국적에 속박당해 있는 실로 비극적인 실존적 부조리였다.
일본 국적에서 이탈하기 위해서 안창호는 중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결정적 순간 그는 다시 일본 국적자의 신분으로 일제에 체포되고 말았다. 프랑스 조계 경찰은 그를 일제 식민지 조선 출신의 일본 국적자로 인식하고서 일본 측에 넘겼기 때문이었다. 그를 보호하려는 중국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중국에 귀화한 안창호는 중국인”이라고 부르짖었음에도 국제정치의 현실에서 안창호는 일본 국적을 벗어날 수 없었다. 조선인은 그 누구도 일본 국적에서 이탈할 수 없다는 일제의 법령이 국제법적 효력을 발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지금도 대한민국 국사학계와 정부는 이른바 “원천 무효설”에 입각해서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국적은 “한국”이라 강변하고 있다. 1965년 12월 18일 발효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제2조에 따라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의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약은 무효이므로 당시 “일제 강점기 우리 국민의 국적은 한국”이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일제의 강점과 식민 지배의 부당성을 고발하려는 의도이겠지만, 역사를 쓸 때는 언제나 특정 시공간을 배경으로 실제 발생한 사태를 객관적으로 기술해야 한다. 부당하다 비판하고 잘못이라 비난해 봐야 그 누구도 이미 지나간 과거사를 사후적으로 무화(無化)할 순 없다. 도덕성도, 합법성도 없는 반인류적 범죄에 대해서 “원천 무효”를 선언한다 해도 과거사를 뒤바꿀 순 없다.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독일 제3제국의 죄악상을 고발할 수 있을지언정 가스실에서 스러져간 6백만 희생자들의 목숨을 되살릴 수는 없듯이.
일제 강점기 안창호의 국적이 진정 한국이었다면 왜 프랑스 조계 경찰은 그의 신병을 일본인으로 파악해서 일제 경찰에 넘겼겠는가? 당시 일제는 범아시아 제국을 꿈꾸는 막강한 군사 대국이었던 반면, 국민·영토·주권도 확보하지 못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자국민을 지킬 힘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일제 강점기 조선인이 모두 ‘일본 국민’에 편입되어 국제법상 일본 국적자로 살아야 했음은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명백한 역사의 현실을 보면서도 중국으로 귀화한 안창호나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우승한 손기정의 그 당시 국적이 ‘한국’이었다고 주장한다면, 역사적 상식에 어긋난다. 일제의 조선 병합과 식민 지배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 점에서 국사학계나 정부의 “원천 무효설”은 역사적 사실의 진술이 아니라 사후적으로 내린 도덕적 평가이자 당위론에 불과하다.
요컨대 “1932년 안창호의 국적은 일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의 객관적 진술이다. 반면 일제 지배가 원천 무효이므로 “1932년 안창호의 국적은 한국이었어야만 했었다”는 주장은 법리적 당위(juridical oughtness)의 설파이다. 16세기 중반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가 지적했듯 ‘존재’와 ‘당위’를 구분하지 못하는 자는 몰락을 면할 수 없다. ‘1930년대 조선인의 국적이 일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진술한 국무위원을 ‘친일파’로 몰고가는 2024년 대한민국의 국회의원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명언일 듯하다. <계속>
△매일 조선일보에 실린 칼럼 5개가 담긴 뉴스레터를 받아보세요.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91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