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2대 총선을 앞두고 실시된 선거 여론조사 가운데 ‘여론 조작’이 확인된 사례가 51건에 이르는 것으로 28일 나타났다. 4년 전인 21대 총선 때(32건)와 비교해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산하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여심위)에 따르면, 22대 총선 국면에서 실시된 여론조사 중 ‘조사 결과 왜곡·조작’이 24건, ‘거짓·중복 응답 유도’ 등은 27건으로 집계됐다. 이 조사들은 특정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연령대별 가중치를 부여하거나 왜곡된 표본을 쓴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 22대 총선을 앞두고 총 4127회의 여론조사가 이뤄졌다. 254개의 지역구 하나당 16.2회꼴로 여론조사가 쏟아져 나온 셈이다. 21대 총선 당시 여론조사가 3191회 실시된 것과 비교하면 30% 정도 늘었다. 전문가들은 “여론조사 결과 수치를 교묘하게 마사지(조작)해 여심위가 적발하지 못한 사례도 상당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치권과 학계에서는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여론조사 업체가 조사를 남발하고, 신뢰성을 담보할 수 없는 여론조사 숫자가 정당의 후보 공천과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 이미 굳어졌다고 진단했다. 이준웅 서울대 교수는 “후보를 여론조사로 결정하는 시스템이 자리 잡으면서 정당이 여론조사에 휘둘리는 상황”이라고 했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여론조사 남발과 왜곡이 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제에 위협이 되는 수준까지 온 것 같다”고 했다.
선관위의 여론조사 검증 시스템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정당·방송사·신문사·인터넷언론사(일평균 이용자 10만명 이상) 등엔 여론조사 사전신고를 면제해 주는 공직선거법도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지난 22대 총선에서는 1555건의 여론조사가 사전신고를 면제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선관위는 이번에 여심위가 ‘여론 조작’으로 판단한 51건의 여론조사와 관련해, 조사를 담당했던 여론조사 업체들의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이 여론 조작에 활용했던 수법들은 업계에선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전문가들은 “교묘하게 여론조사 수치를 만질 경우 전문가들도 쉽게 잡아내기 어렵다”고 했다.
◇마사지
여론조사에서는 성별·연령·지역 등 계층별 응답률이 고르지 않을 때 가중 값을 적용한다. 대표적인 여론조작인 ‘마사지’는 바로 이 가중 값을 왜곡하는 수법이다.
여심위는 공표용 여론조사의 가중값 배율을 최소 0.7배에서 최대 1.5배로 제한하고 있다. 이 배율에 따라 특정 정당·후보에게 유리한 여론조사 결과가 도출될 수 있다. 예컨대 상대적으로 야권 지지 성향이 강한 20대 여성 또는 여권 지지 성향이 강한 60대 이상 남성의 가중값 배율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실제 2018년 지방선거 당시 30대의 가중값 배율이 초과(2.3배)된 여론조사를 실시한 여론조사업체 대표가 여심위에 적발되기도 했다.
문제는 미공표 여론조사의 경우엔 별도의 가중값 배율 규정이 없다는 점이다. 지난 대선 경선 과정인 2021년 9월 명태균씨가 여론조사업체 미래한국연구소 직원인 강혜경씨에게 “젊은 애들 응답하는 계수를 올려서 홍준표 후보 보다 윤석열 (후보가) 더 나오게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을 두고도 ‘마사지’의혹이 제기된 상태다. 이에 대해 명씨는 “강씨가 실수한 부분을 고치려고 한 것이고 나 혼자 보려고 만든 조사였다”고 반박하고 있다.
◇표본 쿠킹
‘표본 쿠킹(cooking)’은 무작위 표본에 특정 성향을 가진 집단을 뒤섞는 방식이다. 통상 여론조사는 통신사로부터 휴대전화 가상번호를 받아 실시한다. 그런데 여기에 자체적으로 구축한 데이터베이스(DB)를 혼합하면 조사 결과가 왜곡될 수 있다. 이미 정치 성향이 확인된 집단을 조사 대상에 추가하면 원하는 대로 결과를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22년 대구시장 예비후보 지지도 여론조사를 수행한 한 여론조사업체가 대구시 선거여론조사위원회로부터 제공받은 가상번호 2만5000개에 자신들이 자체 보유한 전화번호 1523개를 섞은 혐의로 적발된 사례도 있다. 지방선거 출마를 준비했던 A씨는 표본쿠킹 조작 수법과 관련해 “어떤 여론조사 업자가 ‘우리가 보유한 자체 데이터로 여론조사 결과를 맞춰줄 수 있다’면서 찾아온 적이 있다”면서 “여론조사를 ‘맞춰주겠다’는 말도 처음 들었지만, 그 대가로 수억 원을 요구하더라”고 전했다.
◇번호 따오기
여론조사 실시 기간에 전화번호를 대량 확보하는 수법이다. 이렇게 하면 특정 정당·후보 지지 성향이 뚜렷한 집단의 여론조사 접촉면이 확대된다. 번호 따오기는 여론조사업체보다는 여론조사 대상자인 정당·후보 측에서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
최근 군산시장애인체육회 관계자들이 더불어민주당 신영대 의원의 선거운동을 돕겠다며 휴대전화 100여 대를 ‘여론조사 응답용’으로 개통한 혐의로 기소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이보다 앞선 2012년 서울 관악을 야권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당시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 측근들은 총 190대의 일반 유선전화를 개설, 휴대전화로 착신 전환시킨 혐의로 기소됐다. 이 수법으로 다른 지역구 거주자 등 참가 자격이 없는 당원들을 끌어들여서 여론조사에 개입했다는 것이 당시 재판부 판단이다.
◇거짓응답 유도
여론조사 대상자들에게 거짓 응답을 유도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벌어진다. 여론조사 전화가 걸려왔을 때 할당 분을 채우지 못한 성별·연령·지역 집단으로 허위로 답변하게끔 하는 수법이다.
민주당 정동영 의원은 지난해 12월 지지자들에게 “20대들은 죽어라고 (여론조사) 전화를 안 받는다. 여러분이 20대를 해 달라”고 말해 논란이 됐다. 지방선거 여론조사를 앞둔 2022년 4월 국민의힘 김광열 영덕군수 캠프 관계자들도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서 ‘특정 세대의 여성으로 답변해달라’는 취지로 답변을 유도한 것으로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