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은 지난 4일 밤 의원총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윤석열 대통령 탄핵 소추에 반대하기로 당론을 정했다. 법조계에는 지난 3일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헌법과 법률이 정한 계엄 선포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탄핵 소추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평가가 적잖다. 그런데도 국민의힘이 ‘탄핵 반대’ 당론을 정한 것은 ‘민주당 집권 저지를 위한 시간 확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트라우마’ ‘보수 진영 궤멸론’ 같은 정치 현실을 감안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나온다. 탄핵 소추 사유에 해당할 수 있다고 보지만 탄핵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는 것이다.
◇“이재명에게 정권 헌납은 막아야”
국민의힘 지도부는 지난 4일 밤 의원총회에서 윤 대통령 탄핵 소추에 대한 의원들 의견을 수렴했다. 이 자리에서 김상훈 정책위의장과 박상웅 의원 등 발언자 대다수가 “탄핵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친한·비윤계 의원들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수도권 초선 의원은 “만약 헌재에서 탄핵이 인용되면 당장 내년에 범죄 혐의자인 이재명 대표가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 때문에 망설였다”고 했다.
친한계 의원들도 대부분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에 정권을 헌납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이를 위해선 “국민의힘 진영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국민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공감대도 퍼져 있다. 친한계 핵심 의원은 “윤 대통령을 방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야당의 ‘이재명 대통령 만들기’ 시나리오를 막기 위해 탄핵에 반대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여권 일각에서 ‘윤 대통령의 질서 있는 퇴진’이나 ‘임기 단축 개헌’을 거론하는 것도 이런 차원이라는 분석이 있다.
◇박근혜 탄핵 트라우마
국민의힘에선 3선 이상 중진, 영남권 의원들의 탄핵 반대 기류가 더 강하다. 이들은 대부분 8년 전 현역 의원 신분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경험했다. 그런 만큼 탄핵 사태로 벌어진 민주당 집권과 국민의힘 진영 인사들을 겨냥한 이른바 ‘적폐 청산’ 수사, 보수 진영의 침체 등에 대한 트라우마가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3선의 추경호(대구 달성군) 원내대표는 5일 당 최고위원 회의에서 “지난번 박 전 대통령 탄핵으로 남은 것은 극명하게 둘로 갈라진 대한민국과 정치 보복, 적폐 수사뿐”이라며 “대통령 탄핵은 또 한 번 역사적 비극을 반복하는 일이 될 것”이라고 했다. 4선의 김상훈(대구 서구) 정책위의장도 전날 밤 의원총회에서 “민주당은 정권을 넘겨주면 2016년 때처럼 대통령 탄핵이나 조기 하야 프레임으로 치닫는데 여기에 또 속으면 안 된다”는 취지로 의원들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 탄핵 당시 국민의힘 진영의 이른바 ‘탄핵 찬성파’가 이후 ‘배신자’로 낙인찍혀 지금까지도 정치적 고전(苦戰)을 겪는 것도 국민의힘 의원들이 탄핵에 선뜻 찬성하지 못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분석이다.
◇보수 궤멸론
국민의힘에서는 “우리 당이 배출한 대통령이 두 번 연속 탄핵당하는 사태를 맞으면 보수 진영이 공멸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지난 4일 오전에 열린 의원총회에서 박 전 대통령 탄핵 사태 때 찬성 편에 섰던 중진 의원들은 “탄핵 때 결과가 너무 혹독했다. 이번에도 무너지면 20년 동안 정권을 잡기 어렵다”고 발언에 나섰다고 한다. 당시 결정을 후회한다는 취지다.
국회 부의장인 6선의 주호영 의원은 “8년 전 나는 국민의 평균 기대에 못 미치는 대통령을 바꾸기 위해선 탄핵이라는 헌법적 절차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며 “그런데 탄핵 이후 당선된 민주당 문재인 대통령이 저렇게 국가를 해코지할 줄은 몰랐다. 지나고 보니 내가 탄핵에 신중하지 못했다는 후회를 많이 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8년 전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으로서 박 대통령 탄핵소추위원장 역할을 한 5선의 권성동 의원은 “탄핵이 되면 이재명 대표가 집권할 수밖에 없는 수순”이라는 취지로 발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5선인 나경원 의원은 “박 대통령 탄핵 당시, 국민께 사과하고 ‘우리는 다르다’며 일종의 디커플링(분리)을 하면 국민이 우리를 다시 사랑해줄 줄 알았다”며 “그런데 결국 일부는 당을 나가기도 하고, 국민의 신뢰는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 복심으로 불리는 유영하 의원은 “탄핵이 실제로 닥쳐보면 막연하게 상상했던 것과 현실이 굉장히 다르다. 엄혹하고 정말 견디기 어렵다”며 “가장 중요한 게 정권 재창출이니 그걸 기준으로 모든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유 의원을 포함한 중진 의원들의 발언 이후 ‘탄핵 찬성’ 입장이었던 일부 의원도 반대로 입장을 바꿨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