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9월 20일 체코의 두산스코다파워 공장에서 페트로 피알라 체코 총리(오른쪽)와 원전 협력 협약식을 맺고 악수하고 있다. photo 연합

헌정위기로 얼룩졌던 지난해에도 ‘K원전 세일즈’만은 2024년 한국이 세계 무대에서 거둔 성과라고 할 수 있었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후 세계적 ‘탈탈원전’ 조류에 적절히 올라탔다.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이후 탈원전 기조를 이어가던 세계가 탄소배출량 저감이 시급해지자 다시 원전으로 돌아섰고, 한국은 이 수요를 잡아냈다. 지난해 7월 체코 두코바니 원자력발전소에 2기를 짓는 사업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고, 체코 테밀린 원전 2기의 사업 우선협상권을 얻어냈다. 둘을 아울러 30조원 규모 프로젝트다. 이후 루마니아에서도 조 단위의 원전 리모델링 사업을 따내는가 하면 UAE, 이집트, 폴란드 등에서도 기자재 공급·투자 유치 등 수출 토양을 다지고 있었다. 업계가 입을 모으는 비결은 ‘온 타임 온 버짓(On Time On Budget)’. 한국은 정해진 공사 기간과 예산으로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12월 11일 김성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원자력안전법(원안법) 개정안이 도마 위에 올랐다. 본래 신규 원전을 건설할 때는 원전의 건설허가를 받기 전 주요 부품을 미리 제작하는 ‘선발주 선제작’이 관행이었다. 이를 사실상 ‘감리 패스’로 보고 금지하는 것이 개정안의 골자다. 사업자가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건설허가 전 기기 및 설비의 제작에 착수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를 위반하면 건설허가를 취소하도록 했다. 안전성 검증이 되지 않았는데 기기 및 설비를 제작해선 안 될뿐더러 비용이 막대한 부품들을 먼저 만듦으로써 그 매몰비용에 에너지 정책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업계와 학계는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이 선발주 시스템이 ‘온 타임 온 버짓’의 핵심이고, 안전성이 문제라면 허가 단계에서 걸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정권에 이어 또 원전에 어깃장이냐”는 격한 목소리까지 나온다. 한국 이외에 원전 수출 역량이 있는 나라는 미국, 러시아, 일본, 프랑스, 중국 말고는 없다. 원전이 국가대표 수출산업인 만큼 규제가 걸림돌이 되면 곤란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원전은 건설에 수조원이 넘게 들고, 공기업이 주도하는 만큼 자칫하면 국민에게 손해가 전가될 수 있다는 주장에도 설득력이 있다. 이번 원안법 개정안을 둘러싼 주요한 쟁점을 정리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위치한 새울 원전 1·2호기. photo 연합

“원전 건설 하세월, 공기단축이 경쟁력”

건설허가도 받기 전에 부품을 미리 발주하는 게 불합리하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선발주 선제작 관행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이를 위해서는 먼저 원전의 건설 과정을 따져봐야 한다. 원전 건설은 2년 단위로 정부가 제출하고 국회와 논의해 확정하는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른다. 부지가 선정되면 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이 계획 승인을 신청하고, 정부가 승인하면 다시 원안위에 건설허가를 신청한다. 승인 후 준공되면 운영허가 심사를 받는 데 5단계에 걸친 사용전 검사와 품질보증검사를 통과해야 상업운전에 돌입할 수 있다. 여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아무리 적게 어림잡아도 15년이다.

건설허가만 해도 15~24개월 이내에 처리하는 것이 규정이지만 실제로는 더 오래 걸리는 경우도 많다. 이를테면 올 하반기 준공 예정인 새울원전 3호기 심사엔 3년8개월이 걸렸다. 사실 원전의 허가는 ‘시험 후 채점’이라기보단 규제기관의 주문을 사업자가 하나씩 이행하는 방식에 가깝다. 문재인 정부 시절 사업이 중단됐다 이번 정부서 재개된 신한울 3·4호기의 경우, 규제기관 측인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이 공사 중단 기간을 포함해 8년간 7차에 거쳐 2000여건 가까이 질의했다. 안전성 입증을 위해 이런 과정을 반복하니 시일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문제는 원전에 필요한 설비 생산엔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원자로와 터빈발전기 등 ‘주기기’는 최대 10년, 배관이나 펌프 같은 보조기기도 납품에 2~3년이 소요된다. 이렇다 보니 사실상 국가계획이라고 봐야 할 원전의 실시계획이 나오면 한수원이 주요 기기를 먼저 발주하는 것이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선발주는 원전뿐만 아니라 모든 건설에서 공기를 단축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며 “건설기간이 줄면 가격이 낮아지고, 우리 원전의 경쟁력이 거기서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년 하반기 준공 예정인 새울 원전 3·4호기. photo 연합

선발주 관행, ‘원전 알박기’인가

그러나 선발주를 금지해야 한다고 보는 편에서는 이를 두고 ‘대마불사’가 되는 꼴이라고 지적한다. 원안위가 원전의 설계와 건설 안전성을 평가하기도 전에 설비에 대규모 투자를 하게 만들면, 어떻게 그 뒤에 불허 판정을 내릴 수 있겠냐는 것이다. 원전 설비는 최소 수천억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주장에는 근거가 없지 않다. 이런 관행이 처음 문제로 불거진 것은 신규원전이 아닌 월성원전 1호기의 계속운전(수명 연장) 문제에서였다. 당시 한수원은 2012년에 설계수명을 다하는 월성 1호기의 계속운전을 위해 심사를 앞두고 있었다. 원안위의 수명 연장 결정이 난 것은 2015년이었지만, 한수원은 이미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약 6000억원을 들여 원자로압력관 등 노후 설비를 교체한 상태였다.

이에 인근 주민들이 원안위를 상대로 낸 계속운전 허가 취소 소송에서 원안위는 1심 패소했다. 허가 이전에 설비를 교체한 것 자체가 패소 이유는 아니었지만, 사법부는 이 같은 행위가 적절하지 않다고 봤다. 당시 서울행정법원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계속운전을 위한 안전성평가를 전후하여 한수원이 설비교체를 먼저 진행한다면 한수원에는 계속운전이 허가되리라는 기대를 심어주게 되고, (규제기관에는) 독립적이고 공정한 심사를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후 탈원전을 고수했던 문 정부는 월성 1호기를 영구히 정지하기로 했다.

이는 문 정부가 신한울 3·4호기 건설을 백지화하면서도 불거졌다. 한수원은 건설허가 이전 두산에너빌리티에 주기기를 발주해 제작에 돌입한 상태였는데, 당시 수천억원에 달하던 대금 보상 문제에 부딪혀야 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며 작년 9월 건설허가를 받아 공사를 시작한 신한울 3·4호기의 원자로 기자재비는 약 2조3000억원, 터빈은 5700억원이었다. 한 환경단체 관계자는 “당시 원전 업계가 매몰비용을 이유로 건설 재개를 집요하게 주장했다”며 “결국 건설이 재개됐으니 사실상 ‘원전 알박기’인 셈”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재학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그 논리를 인정한다면, 사업자가 부지를 승인받거나 매수하는 절차도 규제 중립성을 해치는 관행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건설허가가 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기를 만들 수 없다면, 허가 전에 하는 행위들이 모두 제약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라는 것이다. 정범진 교수도 “그렇다고 미리 만들지 말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논리”라며 “안전하지 않으면 원안위가 허가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국제적으로도 ‘선발주’가 특수한 경우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주기기 공급계약을 체결한 뒤 건설허가를 취득한 경우는 미국, 프랑스 등 원전 사업에서 보편화되어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관련 규정에 “제작에 몇 년이 소요되는 설비는 공기 지연을 방지하기 위해 건설허가 이전(before the construction licence is granted) 제작이 필요하다”고 명시했다.

안전성 입증된 ‘표준모델’

그렇다면 선발주하는 설비가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는 부품’일까. 현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현재 우리나라가 건설하는 원전은 거의 모두 ‘한국형 가압경수로’로 불리는 APR1400 모델이다. 한국이 개발한 이 모델은 건설단가가 해외의 유사한 노형 대비 절반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아랍에미리트(UAE)에 건설 중인 바라카 원전에 적용됐고, 지난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체코 원전에도 이 모델을 지을 예정이다. 국내에서는 오래전 표준설계인가를 받았다. 비용과 시간을 절감하도록 규격에 맞게 만들어 둔 설계로, 안전성이 확인된 모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제작 과정에서 품질만 검수하면 된다는 것이다. 설비 자체의 품질에 하자가 있다면 건설허가 이후 걸러지게 된다. 정재학 교수는 “국내에서 건설 및 운영 중인 주력 노형인 APR1400은 주요 기기와 설비의 안전성이 입증됐다고 봐야 한다”며 “다만 허가 취득 전 제작과정에서의 품질보증 및 성능검증을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범진 교수는 이처럼 표준설계된 부품을 가지고 선발주, 선제작을 하는 게 일반적인 경우라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예컨대 두산에너빌리티는 판매처가 결정되지도 않은 소형모듈원전(SMR)을 만들고 있다”며 “사업자가 나오면 최대한 빨리 건설하기 위해서인데, (개정안은) 결국 기업활동을 제약하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사기업 경영 vs 원전 공공성

업계는 선발주는 법적으로 금지할 게 아니라 사업자인 한수원이 감당하면 되는 리스크라고 입을 모은다. 정재학 교수는 “사전에 표준설계인가를 받지 않았거나 동일 설계 선행 원전이 없어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면, 허가 전 사전계약에 문제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며 “이 경우에도 원안위의 품질보증 검사나 성능검증기관의 검증 과정에서 문제가 있다면 사용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정 교수는 “선행 건설 이력이 없는 최초 건설 원전에 대해 허가 전 선발주를 제한하는 방안은 고려할 수 있다”면서도 “이 또한 공기단축의 반대급부로 사업자가 감당할 리스크인지, 원안법에서 규제할 사항인지 법리 검토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다만 이를 ‘사적 계약’으로만 간주해도 괜찮은지는 논란거리다. 어쨌든 원전의 건설 비용이 막대하고, 한전 자회사인 한수원이 공기업인 까닭이다. 법안을 발의한 김성환 의원실 관계자는 “기업의 단순한 경영적 판단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규모 아닌가”라며 “(한수원의 모회사인) 한전은 상장기업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독점적으로 사업을 영위하는 유틸리티 기업인 것도 분명하다”고 말했다. 또 “한수원이 판단을 잘못해 수조원 대의 계약을 선발주한 뒤 사업이 어그러지면 그 손해는 국민에게 돌아오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 관계자는 해당 개정안이 원전의 수출 가도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의견에 대해 “원안법은 국내에만 적용되므로영향이 없다”고 일축했다. 다만 이에 대해 정범진 교수는 “원전이 없는 나라에 수출할 때는 우리 원안법을 제공해 참고하도록 한다”고 반박했다. 정 교수는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에서 허가받은 원자로가 해당 국가에도 허가받기 쉬운데, UAE의 경우에도 원안법을 토대로 원전 제도화를 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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