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與圈)은 작년 4월 총선 압승 직후부터 한명숙 전 국무총리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을 재조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대법원 유죄 판결이 확정된 사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 추미애 전 법무장관 등 당정(黨政) 핵심 인사들이 일제히 나서 ‘재조사 필요성’을 강조했다. 재심 신청을 통한 유죄 판결 뒤집기는 어렵다고 보고, 한 전 총리가 검찰의 부당한 수사에 희생됐다는 명분을 찾으려 했다는 해석이 나왔다.
법적으로 향후 8·15 특사에서 친노(親盧) 진영의 ‘대모(代母)’로 불렸던 한 전 총리 사면 명분을 확보하고, 정치적으로는 여권의 검찰·사법 개혁에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다목적 카드’라는 분석도 나온다.
여권에서 한 전 총리 사건에 무리할 정도로 집착하는 것은 그가 민주당에서 갖는 상징성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노무현 정부 국무총리에 민주당 당대표까지 지낸 한 전 총리 사건이 그간 민주당엔 큰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진보’ ‘개혁’을 표방했던 진영의 도덕성에 흠집을 남겼다는 것이다. 2년간 수감 생활을 하고 만기 출소한 한 전 총리에 대한 사면복권이 문재인 정부에서 이뤄지지 않은 것도 정권 입장에선 부담됐을 것이란 말도 나온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재단 이사장 시절인 2011년 ‘한빠(한명숙 열렬 지지자)’라는 표현을 언급하며 “한명숙 전 총리를 좋아한다. 차기 국가 지도자로 한 전 총리만 한 분이 없다”고도 했다. 문 대통령은 이듬해 한명숙 대표 체제에서 초선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문 대통령이 당대표를 하던 2015년 대법원의 한 전 총리 징역형 선고 직후엔 “우리는 한 총리가 역사와 양심의 법정에서 무죄임을 확신한다”고도 했다. 여권 관계자는 “문 대통령으로선 한 전 총리가 친노를 친문으로 부활시켜 집권의 밑바탕을 깔아줬지만, 자신이 집권한 후에도 사면을 해주지 못한 데 대한 마음의 부담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한 전 총리의 남편인 박성준 전 성공회대 교수와도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교수는 문 대통령이 평소 존경하는 사상가로 꼽는 고(故)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와 함께 1960년대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실형을 살았다.
문 대통령은 올해 신년 기자회견에서 “아직까진 정치인 사면을 검토한 적이 없다”며 “앞으로 어떻게 될지 미리 말하긴 어렵다”고 했다. 여권에선 문 대통령의 이런 언급이 4월 재보궐선거 이후 국민 화합을 내건 정치인 사면론이 제기되는 상황까지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여권은 검찰 수사권 폐지를 주장할 때도 한 전 총리 사건을 자주 언급했다. 박범계 법무장관은 “한명숙 재판의 가운데에 양승태 대법원장으로 대표되는 사법 농단이 있었다”고 했다. 야당은 “여당이 한 전 총리 사면을 염두에 두고 검찰 수사와 법원 재판을 공격하는 여론전 강도를 높여나갈 것”이라고 했다.
☞한명숙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
한명숙 전 총리의 ‘9억원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은 한 전 총리가 노무현 정부 말인 2007년 한만호 당시 한신건영 대표로부터 열린우리당 대선 후보 경선 비용 명목의 불법 정치자금 9억원을 받은 혐의로 2010년 기소된 사건이다. 2015년 8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대법원장과 대법관 총 13명은 이 9억원 중 3억원에 대해선 만장일치로 유죄 판단을 내렸다. 한 전 총리 친동생이 한만호 전 대표의 1억원짜리 자기앞수표를 자기 전세 자금으로 쓴 사실, 한 전 총리가 한 전 대표 회사가 부도 난 직후 현금 2억원을 돌려준 사실이 결정적 증거가 됐다. 나머지 6억원에 대해선 유죄 8명, 무죄 5명으로 의견이 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