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 /뉴스1

국가정보원이 2020년 9월 서해 해수부 공무원 이대준씨 피살 사건 당시 이씨가 월북한 것이 아니라 표류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의 자체 보고서를 생산했으나, 박지원 당시 원장이 청와대 지시를 받고 삭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8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국정원은 당시 자체 확보한 첩보와 군 특수정보(SI) 등을 토대로 이씨가 계획적 월북보다 표류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당시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청와대에 파견된 국정원 관계자를 통해 해당 보고서를 삭제하라는 지침을 국정원에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정보 당국 관계자는 “박 전 원장은 청와대 지침대로 관련 보고서를 삭제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최근 박 전 원장을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관련 첩보 보고서 등을 무단 삭제한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박 전 원장은 이날 본지 통화에서 “문건을 삭제한 적도 없고, 삭제를 지시한 적도 없으며, 청와대 지시를 받은 적도 없다”며 모든 의혹을 부인했다. 앞서 박 전 원장은 고발된 직후에도 본지 통화에서 “관련 첩보는 국정원이 만드는 게 아니라 군 정보 당국의 것을 공유하는 것”이라며 “국정원이 생산한 정보가 아니라 보고를 받는 것인데 삭제한다고 삭제가 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직원들에게 삭제를 지시한다고 듣지도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국정원은 내부 감찰을 통해 박 전 원장이 삭제한 보고서는 군 첩보가 아닌 국정원 자체 작성 문건이고, 청와대 지시를 받은 이후 삭제가 이뤄진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직 정보 당국 관계자는 “박 전 원장은 국정원이 첩보 생산은 하지 않는 것처럼 말했지만 국정원 대공 수사국은 다양한 유형의 자체적인 첩보 수집 역량을 갖추고 있다”며 “국방부 등 다른 기관이 생산한 첩보 이외에 국정원 자체적으로 첩보 확보 기술과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국가정보원은 지난 6일 박 전 원장을 고발하면서 혐의를 ‘첩보 보고서 무단 삭제’라고 밝혔을 뿐 보고서 작성 기관을 특정하진 않았다. 박 전 원장이 삭제한 첩보 보고서에 이대준씨가 북측에 공무원 신분임을 밝히고 구조 요청을 했다는 군 특수정보(SI)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자 박 전 원장은 “군이 생산한 정보는 국정원이 삭제할 권한이 없다”는 취지의 주장을 했다. 더불어민주당도 삭제된 보고서를 군 당국이 작성한 문건으로 이해하고 국정원의 자체 조사 내용을 반박하는 입장을 냈다.

그러자 국정원은 전날 언론에 “박 전 원장 등을 군사정보 통합 처리 체계에 탑재돼 있거나 이를 통해 관리·유통되는 문건을 삭제한 혐의로 고발한 것이 아니다”라며 “고발 내용은 이와 전혀 무관하다”고 공지했다. 고발 이유가 군·국방부 문건 삭제 때문이 아니라고 설명하면서도 문건 작성 기관이 어디인지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박 전 원장은 이날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국정원에서 부랴부랴 보고서 삭제라고 보도자료를 냈다”며 “그것 또한 국정원 서버에 남는다”고 했다.

검찰은 박 전 원장과 서훈 전 실장에 대한 수사를 통해 당시 청와대가 왜 국정원에 ‘월북’이 아닌 ‘표류’ 가능성을 담은 보고서 삭제를 지시했는지, 보고서 삭제가 정부의 ‘월북 추정’ 판단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등을 규명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고발은 지난달 국정원이 1급 부서장 27명 전원을 대기 발령 조치하고 고강도 내부 감찰을 진행 중인 상황에서 이뤄졌다. 국정원 감찰팀은 문재인 정부 5년간 이뤄진 남북 정상회담을 비롯한 남북 관계 전반을 면밀히 들여다보는 중이라고 한다. 국정원은 감찰의 신속성과 정확도를 위해 새로 신설한 국정원 기조국장과 감찰실 심의관 자리에 검찰 출신 인사를 발탁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