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과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사들이는 내용의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23일 국회를 통과했다. 법안을 낸 더불어민주당은 정부·여당 반대에도 과반 의석을 이용해 입법을 강행했다. 여당은 쌀 과잉 공급과 재정 부담을 이유로 대통령에게 거부권을 건의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실은 “각계의 우려를 포함한 의견을 경청하고 충분히 숙고할 예정”이라고 했다. 민주당은 이날 양곡법을 시작으로 간호법, 방송법, 노란봉투법도 본회의에서 밀어붙일 전망이다.
국회는 이날 본회의에서 찬성 169표, 반대 90표, 무효 7표로 양곡법 개정안을 가결했다. 양곡법 개정안은 쌀 생산량이 평년보다 3~5% 증가하거나 쌀값이 평년보다 5~8% 떨어지는 경우 정부가 초과 생산량을 매입하는 내용이다. 지금도 정부는 쌀값 폭락을 막기 위해 초과 생산된 쌀을 사서 창고에 넣는 조치(시장 격리)를 하고 있지만 이를 법으로 못 박아 정부 재량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정부는 양곡법 개정안이 만성적인 쌀 공급 초과 현상을 심화시키고 의무 매입에 따라 막대한 재정 지출을 야기할 것이라며 반대해왔다. 2005년 이후 지난해까지 정부는 총 10차례 쌀 시장 격리 조치를 했고, 총 5조3400억원의 재정을 투입했다. 시장 격리한 해를 기준으로 연평균 5300억원을 투입한 셈이다. 하지만 의무 매입이 도입되면 공급 초과가 심화돼 2030년까지 연평균 1조원의 세금이 들어가고, 2030년에는 1조4000억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정부는 예상하고 있다. 가격 안정을 위해 창고에 보관된 쌀은 헐값에 주정(酒精)이나 가축 사료용으로 처분되고 있다.
일부 농민 단체도 양곡법 개정에 반대해왔다. 1인당 쌀 소비량이 10년간 20% 감소한 상황에서 공급 과잉이 심화되면 쌀값이 떨어져 오히려 농민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이다. 쌀에 농업 예산이 집중되고, 작물 다각화가 미뤄져 쌀을 제외한 다른 작물의 수입 의존도가 높아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여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이런 식이면 한우, 닭고기, 멸치 의무 매입법을 만들자는 이야기도 나올 것”이라고 했다.
여당은 이날 양곡법 통과가 총선 전까지 이어질 야당의 ‘입법 독주’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민주당은 양곡법 개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법사위 패싱’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왔다. 민주당은 지난해 10월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서 국민의힘 반대에도 양곡법을 단독 처리했다. 국민의힘이 위원장을 맡은 법사위에서 법안 처리가 막히자, 민주당은 그해 12월 농해수위에서 양곡법에 대해 법사위를 건너뛰고 안건을 본회의에 바로 회부했다. 본회의 직회부에 필요한 ‘재적 의원 5분의 3′ 요건을 채우기 위해 민주당 출신 무소속 윤미향 의원을 끼워 넣기도 했다. 지난달 본회의에서 김진표 의장은 여야 합의를 요구하며 법안 상정을 보류했지만 민주당 반발이 이어지면서 김 의장은 이날 본회의에서 양곡법을 상정했다.
민주당은 이날 본회의에서 찬성 166표, 반대 94표, 기권과 무효 각 1표로 간호법 본회의 부의 안건도 통과시켰다. 본회의 상정과 표결만 남겨 놓은 것이다. 간호법은 의료법에서 간호사에 대한 규정을 별도로 떼어 간호사 처우를 개선하겠다는 내용으로 의사, 간호조무사 등이 반발하고 있다. 민주당은 KBS 이사진 수를 늘려 사장 교체를 어렵게 하는 방송법도 법사위를 건너뛰고 본회의에 직회부해 놓은 상태다. ‘사용자’의 범위를 원청 기업 등으로 확대하는 일명 ‘노란봉투법’(노조법), 정부의 화물 운수 개선안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안전운임제(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 등도 본회의에 올린다는 계획이다.
여당은 야당이 총선을 앞두고 거대 노조, 이익단체, 특정 세대를 위한 법안을 밀어붙이며 ‘편 가르기’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문재인 정부도 보류했던 법을 강행해 국정을 흔들려는 것이다. 이날 본회의에서 양곡법 강행에 대해 반대 토론에 나선 안병길 국민의힘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유도해 궁지에 몰린 이재명 대표를 구출하고, 윤석열 정부가 농민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프레임을 만들어 정치적 이득을 보려는 것 아니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