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기획재정위 소속 여야 의원들이 18일부터 7박 9일 일정으로 유럽 출장을 떠난다. 국회 기재위는 최근 재정을 건전하게 관리하기 위한 재정 준칙은 법제화하지 않고, 내년 총선을 대비해 각종 사회간접자본(SOC) 공사 등을 쉽게 만드는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기준 완화 법안만 여야가 소위에서 처리해 논란을 빚었다.
출장 취지는 유럽 국가들이 재정 준칙을 어떻게 시행하고 있는지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재정 준칙 논의가 지난 2020년 10월 문재인 정부 때 시작해 30개월이 지났는데, 이제 해외 현지 시찰을 가겠다는 것이다. 학계에선 “재정 준칙 도입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과거부터 전문가들이 하던 얘기고 관련 보고서도 많은데, 굳이 유럽 출장을 가겠다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비판이 나왔다.
국회 기재위는 17일 전체 회의를 열었지만, SOC 사업의 ‘예비타당성조사(예타)’ 기준을 500억원에서 1000억원으로 완화하는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처리하지 않았다. 학계 등에서 “국가 재정을 관리하는 법안은 팽개치고, 총선용 포퓰리즘 법안만 여야가 합심해 처리했다”는 비판이 나오자, 여야가 예타 법안 처리를 미루기로 한 것이다. 앞서 여야는 지난 12일 기재위 재정 소위에서 예타 기준 완화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국민의힘 소속 윤영석 기재위원장, 양당 간사인 국민의힘 류성걸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신동근 의원, 국민의힘 송언석 의원과 민주당 김주영 의원 등은 18일부터 27일까지 프랑스·스페인·독일로 출장을 갈 계획이다. 윤 위원장 등은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와 각국 재무관을 만나, 프랑스 등의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한 재정 준칙 경험과 유럽 금융 불안을 겪었던 사례와 해법 등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병태 카이스트 경영학 교수는 “스위스처럼 부채 상한선을 엄격하게 정해놓고 지키는 나라를 시찰하는 것이라면, 재정 준칙 도입의 의지가 있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이번 출장은 낭비성·외유성 출장으로밖에 안 보인다”고 했다. 기재위 관계자는 “작년 하반기부터 잡힌 일정이 몇 번 미뤄졌다가 이번에 가게 된 것”이라고 했다.
재정 준칙은 문재인 정부 때인 2020년 10월 국회에 올랐지만, 당시 여당인 민주당은 ‘코로나 국면’을 이유로 처리에 반대했다. 이후 국민의힘 박대출 의원이 작년 9월 관리재정수지 적자 폭을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제한하는 재정 준칙 관련 법안을 냈지만, 역시 여야 이견으로 처리되지 않고 있다.
여야는 기재위 위원들의 출장이 끝나는 5월 국회 때 재정 준칙을 재논의할 예정이다. 그러나 민주당은 재정 준칙 도입과 ‘사회적경제법’을 함께 처리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사회적경제법은 정부가 구매하는 재화·서비스의 최고 10%를 사회적 기업 등에서 구입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반면, 국민의힘은 사회적경제법에 대해 ‘운동권 지대(地代) 추구법’이라고 반대하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의 작년 5월 ‘해외 주요국의 재정 준칙 시행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영국·일본·EU 회원국 등 106국은 재정 준칙을 시행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은 1947년 재정 수지 준칙을 도입했다. 미국은 1986년, 영국은 1997년부터 재정 수지 준칙을 시행하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2월 영국 예산책임청 리처드 휴스 의장이 최상대 기재부 2차관과의 면담에서 “(재정 준칙은) 반드시 법제화해야 하고, 재정 위험의 사전 분석과 대응이 중요하다”고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아직 한국은 재정 준칙을 도입하지 않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재정 준칙이 없는 나라는 한국과 튀르키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