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찬스’ 특혜 채용 의혹을 받고 있는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 직원이 자기소개서에 “아버지가 선거 관련 공직에 계신다”면서 사실상 ‘아빠 소개서’를 쓴 것으로 11일 나타났다. 이 외에도 부친이 인사 담당자에게 자녀의 지원 사실을 사전에 알리고, 자녀는 자기소개서에 “공직에 종사하는 아버지”라고 적어내면서 은근히 ‘누구 자녀’임을 드러낸 사례도 있었다. 여기에 ‘특혜 채용 의혹’을 받고 있는 직원들은 모두 현직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여권은 “입시 비리가 드러나고도 의사 면허를 붙들고 있는 조국 전 법무장관 일가(一家)와 다를 바 없다”고 비판했다.
국민의힘 전봉민 의원에 따르면 ‘아빠 찬스 특혜 채용’ 선관위 직원 9명은 자기소개서에 부친의 직장을 드러내 놓고 밝히거나, 기본소득 업무 공로로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로부터 표창받았다고 적는 등 당시 집권세력이던 더불어민주당의 입맛에 맞춘 듯한 내용을 써내기도 했다.
일례로 인천선관위 간부 딸인 정모씨는 2011년 10월 자기소개서에 “아버지가 선거 관련 공직에 계셔서 선관위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 선거가 국회의원·대통령 선거 말고 다양하게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며 “선관위로 전입하게 된다면 다시 공직생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제 자신을 낮출 것”이라고 썼다. 당시 면접관 3명은 정씨에게 동일한 점수(4개 항목 ‘상’, 1개 항목 ‘중’)를 부여했다. 정씨는 ‘아빠 근무지’인 인천선관위에 경력직으로 채용됐다.
이번 선관위 자체 조사에서 인사 담당자들이 지원자가 누구의 자녀인지 사전에 알고 있었던 사례는 3건(송봉섭 전 사무차장, 신우용 제주선관위 상임위원, 김정규 경남선관위 총무과장)으로 나타났다. 자기소개서에서 부친이 선관위에 근무한다거나 공직에 종사한다고 밝힌 특혜 채용 직원들도 3명으로 집계됐다.
이 밖에 2016년, 2020년 각각 충남·충북선관위에 채용된 선관위 간부 자녀들 또한 ‘아빠 동료’들이 면접위원인 상황에서 면접을 봐 합격했다. 선관위는 2015년 ‘면접위원 절반 이상은 선관위 소속이 아닌 공무원으로 구성하라’고 내부 규칙을 개정했지만, 충북·충남선관위 경력 채용 과정에선 지켜지지 않았다.
집권 세력 입맛에 맞춘 듯한 자기소개서 내용도 논란이 되고 있다. 신우용 제주선관위 상임위원 아들은 서울선관위 경력 직원으로 응시하면서 자기소개서에 기본소득과 관련된 업무를 했다고 반복적으로 기재했다. 2020년 재난 기본소득 업무 성과로 경기도지사(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로부터 표창받았고, 이 성과를 바탕으로 2021년 근무하던 안성시에서도 ‘지자체를 빛낸 공무원’으로 선정되었다는 식이다. 자기소개서가 제출된 시기(2021년 10월) 이재명 대표는 집권 여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상태였다. 신씨는 자기소개서에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며 “저는 국민 주권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공직자가 되고 싶다”고 적었다.
‘아빠 찬스’ 의혹 선관위 직원들은 자기소개서에서 공직자의 미덕으로 공정, 정의, 청렴을 강조했다. 공직 지원자들이 자소서에 청렴 등을 강조할 수는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드러난 이들의 채용 방식에 비추어보면 전형적인 ‘내로남불’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송봉섭 전 선관위 사무차장 딸이 자기소개서에 “공정한 선거를 위해서는 청렴이 중요하다”고 적어낸 것이 대표적이다.
송 전 차장 딸은 “신뢰라는 것은 한 번의 실수로도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며 “한 사람의 부정부패로 국민 전체가 피해 볼 수 있고, 어렵게 만든 국가라는 전체의 그림을 망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릇도 깨끗하게 비워내야 맑은 물을 채울 수 있는 것처럼 국민 뜻이 선거에 그대로 담길 수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이런 내용의 자기소개서가 제출될 무렵, 선관위 고위 간부였던 송 전 차장은 인사 담당자에게 전화해서 자신의 딸을 직접 추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후 면접관들은 송 전 차장과 지역·직장 연고가 있는 사람들로 채워졌다. 송 전 차장의 딸은 면접관들 전원으로부터 만점을 받고 선관위에 채용됐다.
김정규 경남선관위 총무과장 딸은 자기소개서에서 “공직에 종사하는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일상 속에서 쉽게 준법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며 “이런 성장 환경 덕분에 저도 공무원이 되어서 법령을 준수하여 처리하는 습관이 형성됐다”고 썼다. 자신의 좌우명인 ‘나를 속이지 말자’와 관련해선 “나에게 떳떳해야 남에게도 떳떳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선관위 특별감사에서 김정규 과장 또한 인사 담당자에게 지원자가 자신의 딸임을 사전에 알렸던 것으로 조사됐다. 지원자가 ‘김 과장 딸’이라고 미리 알았던 면접관들은 5개 면접평가 항목에서 동일한 고득점을 줬다. 이렇게 선관위에 채용된 이후에는 김 과장 본인이 직접 딸의 승진심사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현재 경기남부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는 박찬진 전 사무총장, 송봉섭 전 사무차장, 신우용 제주선관위 상임위원, 김정규 경남선관위 총무과장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 상태다. 향후 감사원 감사, 국민권익위원회 전수조사, 국회 국정감사도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현재까지 아빠 찬스 채용 특혜 정황이 드러난 선관위 직원들은 모두 현직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북선관위 소속인 김모씨만 이번 특혜 채용 논란이 불거지기 전인 지난 1월 휴직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봉민 의원은 “선관위 특혜 채용 대부분이 조국 사태로 사회적 공분이 극심한 시기에 이뤄졌다”면서 “‘아빠 찬스’ 선관위 직원들의 모습에서, 입시 비리가 드러나고도 궤변을 늘어놓는 조국 전 법무장관 딸인 조민씨가 겹쳐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