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요한 국민의힘 혁신위원장이 당 지도부, 중진, 대통령 측근 의원에 대해 총선 불출마나 수도권 험지 출마를 요구한 지 열흘이 지났지만 13일까지도 여당에서는 이에 화답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고 있다. 영남권 중진들은 “서울 갈 일 없다”며 지역구 행사에 집중하고 있고, 당 지도부도 “취지는 공감하지만 시점이 이르다”는 반응이다. 과거 당내 인적 쇄신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초선 의원들도 침묵하고 있다. 국민의힘 내에선 “여당의 변화에 대해 국민적 기대가 높은 상황인데 인 위원장마저 혁신을 포기한다면 총선 포기 선언과 다름없다”는 우려도 나온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로 궁지에 몰렸던 국민의힘은 임명직 당직자 교체와 혁신위 출범으로 난국 돌파를 시도했다. 김기현 대표는 4시간 넘는 설득 끝에 인요한 연세대 교수를 혁신위원장에 임명하고 “전권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 혁신위의 1호 제안이었던 이준석 전 대표 등에 대한 징계 철회는 즉각 수용했다. 하지만 인 위원장이 당 지도부와 중진의 희생을 요구한 데 대해선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김 대표는 지난 9일 기자들과 만나 본인의 거취와 관련해 “모든 일에는 시기와 순서가 있다”며 “급하게 밥을 먹으면 체하기 십상이니 잘 한번 보자”고 했다. 국민의힘 핵심 관계자는 통화에서 “불출마가 됐든 험지 출마가 됐든 선언하면 효과는 일주일 후 사라질 것”이라며 “민주당이 총선에 임박해 인적 쇄신에 나설 경우 상대적으로 불리해질 것”이라고 했다. 혁신위의 제안에 따라 인적 쇄신 폭을 키울 순 있지만, 시점이 연말이나 내년 초는 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 대표의 경우 혁신위 활동이 끝나고 총선 체제로 본격 접어드는 내년 1월쯤 본인 거취에 대해 입장을 밝힐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희생’ 대상으로 지목된 일부 중진 의원은 공개 반발했다. 주호영(5선·대구 수성갑) 의원은 지난 8일 지역구에서 가진 의정 보고회에서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40년째 상원 의원을 했는데 지역구를 옮겼나, YS(김영삼 전 대통령)·JP(김종필 전 총리)가 9선 했는데 지역구를 옮겼나”라며 “우리나라만 이상한 발상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저 서울로 안 간다. 정치를 대구에서 시작했으니 대구에서 마칠 것”이라고 했다. 지금까진 혁신위가 특정 인물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다음 주에도 혁신에 대한 당내 호응이 없을 경우 개혁 대상에 대한 구체적 기준을 제시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일부 중진 의원은 혁신위가 실명으로 압박할 경우 무소속 출마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구·경북 지역의 한 의원은 “총선 승리를 위해 인 위원장의 제안 같은 충격 요법도 필요하지만 해당 의원을 뽑았던 지역 유권자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느냐”고 했다.
친윤 핵심으로 꼽히는 의원들도 본인의 지역구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장제원(3선·부산 사상) 의원은 국회 일정이 없으면 대부분 지역구인 부산에 머무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 의원은 지난 11일에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창립 때부터 명예회장을 맡고 있는 지역구 산악회 행사에 버스 92대를 타고 4200명이 모였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알량한 정치 인생 연장하면서 서울 가지 않겠다”며 “우리가 함께 꿈꿔온 사상 발전, 이 일을 위해 남은 인생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도 했다. 총선 인재영입위원장에 임명된 이철규(재선·강원 동해태백삼척정선) 의원 역시 지난 3일 인 위원장의 발표 후 기자들과 만나 “영남 중진 다 수도권 보내면 소는 누가 키우나” “나한테 묻지 말고 지역 주민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여당 내에선 당이 인 위원장의 쇄신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지도부가 ‘혁신 쇼’를 하면서 시간을 벌려 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한 초선 의원은 “의사도 고치길 포기한 정당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성일종(재선·충남 서산태안) 의원은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혁신에는 희생과 아픔이 따르기 마련”이라며 “우리 당이 인요한 혁신위의 혁신안에 답할 차례”라고 했다. 당 일각에선 지도부의 ‘시점 고민’을 모르지 않는 인 위원장이 공개적으로 빠른 용단을 압박하는 것이 당을 조기에 선거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하자는 당 안팎의 여론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