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내년 4·10 총선을 앞두고 2030세대를 겨냥해 새로 만든 현수막이 2030을 비하했다는 비판이 당 안팎에서 제기됐다. 민주당은 최근 ‘정치는 모르겠고, 나는 잘살고 싶어’ ‘경제는 모르지만 돈은 많고 싶어’ 같은 문구가 담긴 현수막을 공개했다. 그러나 여당은 물론 야당 내부에서조차 “2030세대를 정치·경제에 무관심하면서 편안함만 추구하는 이기적 집단으로 폄하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최근 송영길 전 대표의 한동훈 장관에 대한 ‘어린놈’ 폭언에 3040세대가 동요하는 가운데, 민주당은 현수막 문제가 2030세대에 미칠 영향에 촉각을 세웠다. 국민의힘은 ‘운동권 선민의식’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당은 지난 17일 ‘2023 새로운 민주당 캠페인’을 하겠다는 공문을 시·도당에 배포했다. 문제의 현수막을 전국 각지에 내걸라며 “개인성과 다양성에 가치를 두는 2030 위주로 진행” “나에게 쓸모 있는 민주당으로 변화하겠다는 캠페인”이라고 설명했다. 이 사안은 당일 이재명 대표와 최고위원단 등 지도부에도 보고됐다. 책임자로는 한준호 홍보위원장, 조정식 사무총장 등이 공문에 명기됐다.
그러나 한 위원장은 19일 국회에서 기자들을 만나 “업체가 내놓은 문구를 당에서 조치해준 것뿐”이라며 “당직자나 당이 개입한 사안이 아니다”라고 했다. 취재진이 “꼬리 자르기 아니냐”고 하자 “동의하기 어렵다”고 했다. 당의 지시를 받아 일을 하는 용역 업체를 탓한 것이다. 그럼에도 논란은 확산됐다.
친명·비명계는 한목소리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친명 김두관 의원은 “청년 비하가 아니라 청년 능멸 수준”이라고 했다. 원외 친명 그룹 더민주전국혁신회의도 “윤석열 정권하에서 악화하는 청년의 경제·사회적 조건에 대한 이해, 청년의 좌절·불안에 대한 공감도 없다”고 했다. 비명계 모임 ‘원칙과 상식’(김종민·윤영찬·이원욱·조응천)은 “70년 당 역사상 최악의 홍보물”이라고 했다. 이들은 “이재명 민주당이 청년 세대에 대한 인식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논란이 된 문구는 당 결정권자들이 ‘요즘 MZ(2030세대)가 이런 걸 좋아한다더라’며 제작을 강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혼자 살고 싶댔지 혼자 있고 싶댔나?’ 같은 문구는 청년층의 비혼(非婚) 풍조에 밀착, 민주당이 청년 돌봄 정책을 신경 쓰겠다는 취지였지만 젊은 당직자들은 ‘비아냥거리는 것 같다’며 만류했다고 한다. 당 관계자는 “청년들이 좋아할 것 같다며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들고 와 결정하는 사람들이 다 청년이 아니니 뭐 어쩌겠나”라고 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같은 베스트셀러 제목을 차용하려 했다는 말도 나왔다.
‘원칙과 상식’이 이날 국회에서 개최한 청년 간담회에서 당사자인 청년들은 ‘민주당이 청년의 실제 삶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는다’ ‘청년을 그저 관념화·대상화하는 데 급급한 민주당이 앞으로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겠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하헌기(35) 전 상근부대변인은 “2030이 개인 이익에 매몰됐다고 생각하고 선거 전략을 짜는 기조 자체가 문제”라고 했다.
전성균(33) 화성시의원은 “이번 현수막 논란으로 2030이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오는 길을 막았다”고 했다. 김민재(25) 경남도당 대학생위원장은 “업체 잘못이라는 식의 사과 아닌 사과도 너저분하다”고 했다. 이들은 “왜 잘못했다고 깔끔하게 사과를 못 하느냐”고도 했다.
민주당 당원 게시판엔 “당에 실망했다” “탈당하겠다”는 글이 빗발쳤다. 한 30대 당원은 “몇 년째 작은 돈이지만 당비도 납부했다”며 “문구 하나 작은 결정에도 당의 결정자들이 젊은 층에 어떤 이해도를 갖고 있는지 잘 알겠다. 이런 정당이 총선에서 민심을 잡을 것 같진 않다”고 했다.
논란이 커지자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민주연구원에서 오랫동안 준비해온 캠페인”이라며 “문구는 이미 삭제 조치를 했다”고 했다. “2030 대상도, 총선용도 아니다”고도 했다. 중앙당 홍보국이 청년을 사업 대상으로 명시한 공문이 존재하는데도 사과 없이 책임 전가만 한 것이다. 국민의힘 최현철 상근부대변인은 “무책임한 떠넘기기를 하지 말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라”고 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정치 저(低)관여층인 청년들에게 다가가겠다는 의도였겠지만 결과물이 참사 수준”이라고 했다. 명지대 신율 교수는 “민주당 결정권자들은 그런 문구를 참신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라며 “유권자를 계몽의 대상으로 사고하는 운동권 습성”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