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도 예산안이 정치권의 이념성 ‘묻지 마 칼질’로 넝마처럼 만들어지고 있다. 예산안은 정부의 철학과 국가의 백년대계를 담아 마련돼야 하지만, 여야의 증오가 예산안 심사에 그대로 드러나면서 전액 삭감 등의 극단적 방식으로 감정의 골만 키우고 있다는 것이다. 여야 모두 ‘청년’을 위한 예산이나 ‘연구·개발(R&D)’ 비용 확대 등을 예산 심사 기준으로 내세우는 만큼 충분히 교집합을 찾을 수도 있지만, 타협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는 지난 14일 예산안 심사 소위를 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날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예산 중 정부가 내년에 새로 도입할 예정인 ‘글로벌 TOP 전략 연구단 지원 사업’을 비롯해 ‘첨단 바이오 글로벌 역량 강화 항목’ 등에서 1조1600억원을 감액했다. ‘글로벌’이란 단어가 들어간 예산 항목은 윤석열 정부의 중점 정책이란 이유로 ‘묻지 마 삭감’ 대상으로 들어간 것이다. 민주당은 이런 정부 사업 예산을 단독으로 삭감한 뒤 R&D 연구원 운영비나 인건비 중심으로 약 2조원의 예산을 늘렸다.

그래픽=이철원

민주당의 이 같은 예산 심사는 정부·여당이 원인을 제공한 측면도 있다. 정부가 ‘연구비 카르텔’을 언급하며 내년도 R&D 예산안을 대폭 삭감한 데 대한 과학계의 반발이 거세지자, 민주당이 윤석열 정부의 중점 예산은 자르고 표심을 겨냥한 인건비 위주의 R&D 예산을 짠 것이다. 여당도 R&D 예산 추가 편성의 의지를 수차례 밝힌 만큼 협의의 가능성도 있었지만, 상임위에선 어떤 타협도 이뤄지지 않았다.

민주당은 또 지난 16일 환경노동위에서 현 정부가 추진하려는 청년 일자리 사업 예산 2382억원을 통째로 없앴다. 청년이 취업 시장에 나서기 전 직무 경험을 쌓게 해주는 사업(1663억원), ‘청년 니트(NEET)족’이 노동 시장에 나가도록 지원하는 사업(706억원), 청년 친화 강소 기업 선정 및 운영비(13억원)를 전액 삭감했다. 한미 대학생 연수 사업은 20억원 깎았고, 한일 대학생 연수 사업 6억원은 전액 삭감했다.

여권은 정부·여당이 ‘운동권 지대(地代) 추구법’이라며 반대하는 사회적기업법 예산 등을 증액하자고 민주당이 요구했지만, 정부·여당이 받아들이지 않자 보복성 예산 삭감을 했다고 비판했다. 민주당은 이전 정부 때 시행하던 청년 사업 예산을 현 정부가 1조원 이상 감액한 것이 문제라고 맞받아쳤다. 대신 민주당은 20일 산자위에서 중소벤처기업부의 ‘청년 재직자 내일채움공제 플러스’ 사업 예산을 900억원 단독 증액했다. 이 사업은 문재인 정부 때 만든 ‘청년 재직자 내일채움공제’ 사업의 후속 사업이다.

예산안에 여야가 타협할 공간이 없다 보니, 내년도 예산안은 기형적으로 바뀌는 중이다. 민주당은 ‘이재명표’ 예산엔 1조원을 증액했다. 청년 교통비 지원 사업인 ‘3만원 청년 패스’ 예산을 2900억원, ‘지역사랑상품권’ 예산을 7053억원 증액한 것이다. 새만금 잼버리 부실 문제로 여야가 서로 네 탓을 하던 앙금이 이번 예산안 심사에 이어지기도 했다. 정부가 깎은 새만금 신공항·고속도로·철도 예산은 민주당이 1471억원 단독으로 증액했다. 내년도 예산안이 ‘윤재명’ ‘문석열’ 예산안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나랏빚을 최소화하려는 노력도 없다. 재정 준칙은 여전히 법제화되지 않고 있고, 이날까지 상임위 11개는 정부 예산안보다 약 11조원을 증액했다. 예산 증액을 할 땐 정부의 동의가 필요한데, 이런 절차는 지켜지지 않은 지 오래다.

여야는 이날도 예산안 심사를 두고 서로 비난했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이날 최고위원 회의에서 “민주당은 ‘묻지 마 난도질’을 일삼고 뻔뻔하게 이재명 대표 광내기 예산으로 채우려 한다”고 했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대학을 졸업한 후에 학자금의 이자를 일정한 소득이 있을 때까지 면제해 주자고 하는 학자금 지원법에 대해 국민의힘이 계속 발목을 잡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