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김재섭(36)이 당협위원장을 맡고 있는 서울 도봉갑은 전통적 민주당 강세 지역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인 2008년 총선에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 신지호 전 의원이 이긴 적이 있지만 그건 예외적 경우였다. 민주당 김근태(15, 16, 17대) 전 의원과 그의 아내 인재근(19, 20, 21대) 의원이 모두 6번 당선됐다. 김재섭은 국민의힘이 대패했던 2020년 총선에서 서울 도봉갑에 32세의 나이로 출마했다. 결과는 인재근 의원과 대결해 득표율 40.5%(13.5%포인트 차이)로 낙선했지만 정치 신인치고는 선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재섭은 1987년 서울 도봉구에서 태어났고,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럭비부에서 뛰었다. 졸업 후엔 법률가의 길을 걷는 대신 모바일 플랫폼 기업을 창업했다. 사업을 하며 경제의 발목을 잡는 정치를 바꿔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이번에도 이곳에 다시 출마할 계획이다. 김재섭은 10일 본지 인터뷰에서 최근 현 정부 장관이나 대통령실 수석, 그리고 중진 정치인들이 서울 강남권이나 경기 분당, 영남 등 ‘꿀 지역구’를 놓고 다투는 모습에 대해 “보시는 국민들이 다 웃긴다고 한다”고 말했다.
“당, 다른 의견 말하면 배신자 취급”
―요즘 지역 분위기는 어떤가.
“몇 달 전부터 최악으로 치닫는 것 같다. 작년 대선 승리했을 때만 해도 지역 주민들이 ‘이제는 국민의힘도 한번 해봐야지’ ‘자네도 열심히 해봐’ 격려해 주셨다. 그런데 이젠 ‘그 당을 어떻게 찍으라는 것이냐’며 명함을 찢어버리는 분도 계셨던 2020년 총선 때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강북과 달리 강남과 분당 같은 곳은 당내 경쟁이 치열하다.
“장관을 하신 분들, 용산에서 수석을 지낸 분들이 가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다. 정부에서 그런 고위직을 수행한 것 자체가 혜택이다. 혜택을 받았으면 헌신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명예로운 경력을 무슨 선거용 스펙쯤으로 여기는 것 아닌지 개탄스럽다. 총선은 전국 선거다. 당이 한 석, 한 표라도 더 얻을 수 있도록 헌신하는 게 스타 정치인의 도리 아닌가.”
―영남 및 친윤 중진들의 험지 출마와 희생 이야기도 나온다.
“일단 영남 중진들의 수도권 차출론은 그만 듣고 싶다. 솔직히 그분들이 수도권에 와서 뭘 할 수 있겠나. 그리고 수도권 유권자 입장에서도 선거 몇 달도 안 남았는데 그런 분들이 공천받아 나오는 건 모욕적이다. 유권자들은 지역구에 무슨 소 끌려 나오듯 억지로 나온 후보를 바로 알아본다.”
―반대로 수도권엔 젊은 신인들을 보낸다.
“바라는 건 별로 없다. 그냥 젊은 사람들이 어려운 지역에 가서 뭔가를 하겠다고 하면 가만히 두기만 했으면 좋겠다. 도봉구를 예로 들면,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에선 국민의힘과 반대되는 얘기를 해야 할 때가 있다. 당의 근본 철학과 어긋나지 않는다면 그런 목소리도 품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조금만 의견이 달라도 ‘내부 총질’이니 ‘배신자’니 하고 살려두지를 않는다. 이러니 소위 험지라는 곳에 젊은 사람들이 남아나나.”
―이를테면 어떤 이견인가.
“김포 편입 반대 같은 의견이다. 민주당세가 강한 지역구에서도 윤석열 대통령, 오세훈 서울시장을 많이 지지했다. 그렇다면 엄연한 서울 시민인 이분들이 왜 국민의힘에 투표했는지 파악하고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게 책임 정치다. 표값은 드려야 하는 것 아닌가. 도봉구의 낙후된 주택·교통·생활 인프라를 아는 정치인으로서 ‘있는 서울’ 유권자부터 잘 챙기라고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김포 서울 편입 반대했더니 ‘당을 나가라’ ‘민주당 간첩’ 같은 온갖 욕을 다 한다.”
―그래도 서울 강북에서 재수에 도전하는 이유는.
“사실은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저도 잘하고 싶은 마음이 마구 깎여나간다. 2020년 총선 때는 3~4시간밖에 안 잤다. 이후 4년 동안 지역구를 발로 뛰면서, 대통령과 서울시장 선거 이기는 모습을 보며 ‘뭔가 좀 되겠다’ 싶었다. 그런데 1년 조금 지나 당이 예전으로 돌아가는 모습에 선거를 아예 포기하겠다는 젊은 후보가 많다. ‘왜 우리가 돈 쓰고 시간 쓰고 몸 축내가면서 이 짓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당을 침몰하는 타이태닉에 비유했는데.
“따뜻한 곳에 계신 분들은 추운 곳에 있는 사람 마음을 잘 모른다. 양지 출마하려는 분들이 영화에 나오는 턱시도·드레스 입고 파티하시는 분들이라면, 수도권에서 구르는 우리는 배 밑바닥에서 석탄 집어넣다가 익사하는 화부(火夫)들이다. 그런데 저 윗분들을 위한 구명보트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이번 총선이 기록적 참패를 한 2020년 총선 ‘시즌 2′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2020년 총선 정도만 돼도 다행이라고 한다. 2018년 지방선거가 반복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들 한다.”
국민의힘은 21대 총선에서 수도권 16석을 얻었다. 19대 43석, 20대 35석에서 계속 줄었다. 2018년 지방선거에선 광역자치단체 17곳 중 15곳을 내주는 궤멸적 패배를 당했다.
―위기감에도 당은 비교적 조용하다.
“이러다간 정말 영남 지역당으로 전락할 것이다. 당의 기득권을 영남 출신들이 모두 장악했기 때문에 그냥 거기에 아무 말 안 하고 조용히 잘 보이려고 하는 문화 탓이 크다. 영남에선 유권자 멱살만 안 잡으면 당선된다는 말이 있다. 유세차도 안 돌아다녀도 된다. 무조건 당선이다. 이런 곳에서 공천을 받으려면 튀지 않고 무난하게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
―수도권 정서와 계속 떨어지는 다른 이유는 없나.
“당이 수도권 유권자들에게 접근하려는 노력을 안 한다. 2020년 인천에서 수돗물 유충 사태가 터진 다음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이 발생했다. 수도권에선 맘카페를 중심으로 수돗물 문제로 난리가 났지만 우리 당에선 한두 마디 하고 끝났다. 두 사건 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치명적 영향을 주는 중대한 일이다. 하지만 국민의힘은 수도권 정서의 핵심 축이라고 할 수 있는 3040 세대, 특히 여성들의 정서에 대한 이해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총선 포기하겠다는 젊은 후보 많아”
―2030 남성들과도 다시 멀어진 건 아닌가.
“호텔에서 사우나 하시고 골프장 나가시는 5060 장년층 시각으로는 일주일에 5~6일 헬스장 가서 쇳덩어리와 씨름해야만 스트레스가 풀리는 2030 남성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면접관 뺨만 안 때려도 취업했던 분들이 영혼 밑바닥까지 스펙을 긁어모아도 안 되는 청년들의 삶에 밀착하는 정책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도봉구에서 정치를 하는 이유는 뭔가.
“여기서 태어났고 일가친척이 모두 거주한다. 민주당 정치인들은 도봉구에서 도대체 뭘 했나 묻고 싶다. 발전을 최대한 미뤄야만 표가 나온다는 전략이었나. 언젠가부터 고향을 짓누르는 이 무력감을 반드시 깨뜨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