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12일 국회에 출근하지 않았다. 새벽 4시면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는 김 대표가 외부 일정 없이 출근하지 않는 것은 이례적이다. 의원과 당직자가 수시로 오가는 국회 본청 내 당대표실은 일과 시간엔 문을 열어두지만, 이날은 문이 닫혀 있었다. 김 대표는 이날 오후 서울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진행된 당 지도부의 연탄 봉사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당은 13일 계획된 정책 의원 총회도 취소했다.
김 대표는 전날 당에 “한 이틀간 국회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라며 “연탄 봉사 일정은 윤재옥 원내대표 중심으로 진행하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 대표는 당 의원들과도 접촉을 삼가고 있다고 한다. 김 대표가 본인의 거취를 두고 장고에 들어간 것이다.
친윤 핵심 장제원 의원이 이날 “백의종군하겠다”며 불출마를 공식 선언하자, 당 안팎의 관심은 김 대표가 어떤 선택을 할지에 쏠렸다. 인요한 전 혁신위원장은 최근 당 지도부에 ‘김·제·동(김기현 대표, 장제원 의원, 권성동 의원)’의 희생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 가운데, 장 의원이 ‘김·제·동’ 중 처음으로 희생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김 대표와 장 의원은 올 초 전당대회 때 김 대표 당선을 위해 ‘김장 연대’로 뭉친 적도 있다.
장 의원의 불출마 선언 전만 해도 당에선 김 대표가 당대표직은 유지하되, 총선 불출마 선언을 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김 대표가 전날 최고위원 회의에서 “저를 비롯한 우리 당 구성원 모두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기득권을 내려놓겠다”고 한 뒤, 김 대표와 가까운 김석기 최고위원이 “김기현 대표가 물러나고 누가 당대표가 돼야 총선에서 이긴다는 말이냐”고 발언한 것도 사실상 김 대표 생각 아니냐는 것이다. 불출마 발표 시점은 당 공천관리위원회 구성이 완료되고, 더불어민주당이 밀어붙이는 ‘쌍특검법’ 처리 등 여야 대치 국면이 끝나는 내년 초가 될 것이란 전망이었다.
그런데 장 의원의 불출마 선언으로 상황이 급반전됐다. 당 지도부 관계자는 “당대표를 무조건 끌어내려서는 안 되지만, 과연 김 대표가 버틸 수 있겠느냐”고 했다. 여권에서는 공개적으로 김 대표의 사퇴 요구 주장도 나왔다. 김태흠 충남지사는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사즉생은 당 구성원 전체에게 요구할 것이 아니라 김기현 대표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용호 의원은 “김 대표의 희생과 헌신이 불출마나 험지 출마여서는 안 된다”며 “대표직을 내려놓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여권 내부에선 김 대표가 네덜란드를 국빈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의 귀국 전에 거취를 결정할 것으로 보고 있다. 윤 대통령은 11일 네덜란드로 떠났고, 3박 4일 일정을 소화한 뒤 15일 오전 귀국할 예정이다. 당 관계자는 “대통령 귀국 전에 당연히 문제를 매듭지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당내 서열상 다음인 윤재옥 원내대표가 당분간 당대표 권한 대행을 할 것이란 말도 나왔다. 비상대책위원회로 넘어가려 해도, 위원 구성도 어렵고 절차도 복잡해 당장은 힘들다는 것이다. 윤 원내대표가 일단은 상황을 관리하면서 비대위 전환 등 새 지도 체제 구성을 모색한다는 설명이다. 일각에선 윤 원내대표가 권한 대행 체제를 계속 유지하면서 선대위를 일찍 출범시켜 아예 총선 준비를 선대위가 전적으로 하게 만들자는 얘기도 나온다.
그러나 김 대표의 당대표직 사퇴가 부적절하다는 당내 의원들의 여론도 만만치 않다. 유상범 의원은 본지에 “현시점에서 김 대표의 대표직 사퇴를 운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했다. 강민국 의원도 “당대표 사퇴 후 무슨 대안이 있느냐”며 “총선을 4개월 앞두고 당이 단일대오로 나서도 모자란데, 당내 권력 다툼만 하다 끝날 판”이라고 했다.
김병민 최고위원은 본지에 “김 대표가 희생 의지를 밝힐 시점을 실기한 측면이 있다”며 “어떤 결정을 하든, 답을 낼 시점은 사실상 마지막 골든 타임인 이번 주인 것 같다”고 했다. 한 재선 의원도 “김 대표가 그동안 답답한 모습을 보인 측면이 있다”며 “어떤 결론이든 이른 시일 내에 확실하게 말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 대표 측은 “그동안 김 대표는 희생 의지를 꾸준히 밝혀왔다”면서도 “어떤 방식을 택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