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1일 민주당을 탈당했다. 이 전 대표는 “민주당은 이미 ‘낯선 집’이 됐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와 품격은 사라지고 폭력적이고 저급한 언동이 횡행하는 1인 정당, 방탄 정당으로 변질했다”고 말했다.
이 전 대표는 이날 오후 국회 기자회견에서 “24년 동안 몸담았던 민주당을 벗어나 새로운 위치에서 새로운 길에 나서기로 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전 대표는 민주당에서 5선 국회의원, 전남지사, 문재인 정부 초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2003년 열린우리당 분당, 2016년 국민의당 분당 때도 민주당에 남았다. 그는 “마음의 집이었던 민주당을 떠나는 건 참으로 괴로운 일”이라고 했다.
이 전 대표는 “무능하고 부패한 거대 양당이 진영의 사활을 걸고 극한 투쟁을 계속하는 현재 양당 독점 정치 구조를 깨지 않고는 대한민국이 온전하게 지속될 수 없다”며 “혐오와 증오의 양당제를 끝내고, 타협과 조정의 다당제를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이 전 대표는 거대 양당이 끌고 가는 현 정치 구조를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 “후목불가조(朽木不可雕·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할 수 없다)”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는 ‘제3지대’에서 힘을 규합하겠다며 국민의힘을 탈당한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에 대해 “누구와도 협력할 용의가 있다”며 “양당 독점 정치 구조를 깨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기 때문에 힘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이준석 전 대표와는 이념적 지향이 다르다는 지적엔 “DJP(김대중·김종필) 연합보다는 훨씬 거리가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는 “양당에서 대표까지 지냈기 때문에 폐해를 더 잘 안다”며 “그런 반성에 입각한 새로운 정치 시도는 더 결실을 맺기 쉽다”고 했다. 이낙연 전 대표는 이날 오후 CBS 라디오에서 이준석 전 대표와 이달 초 “단 둘이 비밀 회동을 한 적이 있다”며 두 사람의 만남은 ‘세대 통합의 새로운 모델’이라고 했다.
이낙연 전 대표는 신당 창당을 추진하면서 민주당을 먼저 탈당한 현역 의원들인 ‘원칙과 상식’(이원욱·김종민·조응천)과 힘을 합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이날 “우선 원칙과 상식의 동지들과 협력하겠다”고 했다. 정태근·박원석 전 의원의 정치 혁신 포럼 ‘당신과 함께’도 여기에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일단 현 야권 계열 신당 연대의 주축이 되는 것이다. 신당 세력은 이르면 14일 창당 준비 위원회를 출범시킬 계획이다.
야권 신당들이 출범하면 국민의힘을 탈당한 이준석 전 대표의 개혁신당(가칭)과 통합·연대 논의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원칙과 상식의 김종민 의원은 민주당을 탈당하기 전 이준석 전 대표를 만나 향후 선거 구상을 공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의원은 본지 통화에서 “이준석 전 대표와는 자주 만나 이런저런 얘길 하는 사이”라고 말했다. 개혁신당 측도 “원칙과 상식과 두루 소통 중”이라며 “통합이라는 큰 틀에 공감한다”고 했다.
현재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야 지지율은 30%대에 정체돼 있다. 대신 무당층이 30~40%나 된다. 조선일보·TV조선·케이스탯리서치 신년 조사에서 ‘지지 정당이 없다’와 ‘기타’를 합치면 34%였다. 이낙연 전 대표는 이준석 전 대표의 손을 잡고 양당 극단 정치에 지친 이런 무당층 유권자들을 아우르겠다는 것이다. 이낙연 전 대표는 “양당의 철옹성 같은 독점 구도를 깨뜨리는 데 의미 있는 정도의 의석을 얻는 것이 신당의 목표”라며 253개 지역구에 후보를 모두 내겠다고 밝혔다. 자신은 총선에 불출마한다고 했다. 야권 신당 관계자들은 “연대를 통해 이번 총선에서 ‘기호 3번’으로 30석 이상을 얻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고 있다.
과거 총선에서도 자유민주연합(15대·50석)과 국민의당(20대·38석) 같은 제3당이 성공한 사례가 있다. 현직 대통령에 버금가는 인지도의 대선 주자(김종필·안철수)가 탄탄한 지역 거점(충청·호남)을 갖추고 돌풍을 일으켰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낙연 전 대표와 이준석 전 대표의 인기나 기반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다. 조선일보·TV조선·케이스탯리서치 조사에서 이낙연·이준석 신당의 지지도는 각각 4%, 7%였다.
양당에선 “속으로는 권력과 명예를 탐하면서 겉으로는 그럴 듯한 제3당 명분을 내거는 기회주의자들”이라는 비난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그러나 신당 관계자들은 “대한민국 양당제의 폐해는 이제 고쳐 쓰지도 못할 지경”이라며 “최근 야당 대표 피습이나 극단 유튜버들의 흉기 난동을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이낙연 전 대표도 이날 탈당 선언문에서 “혐오와 증오의 양극 정치, 모든 것을 흑백 양자 택일로 몰아가는 양극 정치로는 다양성에 시대에 대처할 수 없다”고 했다. 이준석 전 대표도 지난달 국민의힘을 탈당하며 “논리와 이성은 사라지고 선악을 가르는 야만이 횡행한다”고 했다.
‘대선 주자와 지역 기반이 없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신당 세력은 “2024년 대한민국 정치는 과거와 다르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와 같이 사람과 지역에 대한 일방적인 지지는 없다는 것이다. 이낙연·이준석 신당은 향후 호남·영남을 각각 기반으로 세력을 다져 나가면서 최종적으로는 수도권을 목표로 한 선거 전략을 구상 중이다. 신당 관계자들은 “현재 여론조사에 크게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며 “유권자들의 마음은 투표장에서 제대로 표출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2016년 4·13 총선 1~2개월 전에도 국민의당 지지율이 한 자릿수였던 사례를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