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인 28일 오전 텅 빈 국회 본회의장에서 더불어민주당 조계원 의원이 방송문화진흥회법 개정안에 대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하고 있다. ‘방송 4법’ 관련 25일부터 시작돼 이날까지 나흘째 이어지고 있는 필리버스터는 30일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이덕훈 기자

더불어민주당이 주말에도 국회 본회의를 열어 ‘방송 4법’ 강행 처리를 이어 갔다. 민주당은 지난 26일 방송통신위원회법 개정안을 처리한 데 이어 28일엔 방송법(KBS 관련) 개정안을 국민의힘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강행 처리했다. 민주당은 29일엔 방송문화진흥회법(MBC 관련), 30일엔 한국교육방송공사법(EBS 관련)도 강행 처리할 방침이다. 정부·여당은 “친야 공영방송 지배 구조를 만들려는 것”이라고 반발하며 지난 25일부터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에 들어갔다. 하지만 190석 이상을 확보한 민주당 등 야당은 토론을 강제로 중단시키고 법안을 차례로 통과시키고 있다.

국민의힘에선 “대통령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건의하겠다”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해당 법안에 대해 재의를 요구할 것이 확실시된다. 이에 따라 국회에서 재표결이 이뤄지면 부결·폐기될 공산이 크다. 민주당은 방송 4법에 이어 다음 달 3일 회기가 끝나는 7월 임시국회에서 민생지원금법과 노란봉투법 개정안도 강행 처리할 방침이지만, 윤 대통령은 이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폐기될 법안을 두고 여야가 ‘여당 필리버스터→야당 강행 처리→대통령 거부권→재표결’을 반복하는 소모전을 벌이는 셈이다.

일러스트=박상훈

이런 가운데 국민의힘 소속 주호영 국회부의장은 28일 여야를 향해 “여야 지도부가 국회의원들을 몰아넣는 이 바보들의 행진을 멈춰야 한다”고 호소했다. 본회의 사회를 거부한 주 부의장은 “거부권으로 무효가 될 법안을 이렇게 밀어붙이는 것은 입법권을 스스로 무력화시키는 행위”라면서 여야에 각각 필리버스터와 법안 강행 처리를 중단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민주당 강유정 원내대변인은 “총선에서 헌정 사상 최초로 야당이 (국회) 과반을 한 건 거부권 정국에 입법권으로 맞서라는 민심이 반영된 결과”라고 했다.

민주당 등 야당은 지난 25일 국회 본회의에 방송통신위원회법·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한국교육방송공사법 등 ‘방송 4법’을 일괄 상정했다. 방통위법은 방통위원 전체 5인 중 4인 이상이 출석해야 회의를 열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고, 나머지 방송 3법은 KBS·MBC·EBS 이사 수를 대폭 늘리고, 이사 추천권을 언론 관련 단체·학회 등에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방통위 의결 정족수가 4인으로 늘면 야당이 자기 몫 방통위원(5인 중 2인)을 추천하지 않거나 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면 방통위 운영이 마비된다. 공영방송 이사 수를 대폭 늘리는 등을 담은 방송 3법이 시행되면 현재 정부·여당이 진행 중인 공영방송 이사진 교체 작업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 정부·여당이 야당의 일방 처리를 수용할 수 없는 쟁점 법안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25일 오후 우원식 국회의장이 방통위법을 본회의 표결 안건으로 상정하자 국민의힘은 곧바로 필리버스터에 돌입했다. 하지만 필리버스터는 국회법에 따라 재적 의원 5분의 3(180석) 이상이 찬성하면 24시간 후 강제로 종결할 수 있다. 190석이 넘는 민주당 등 범야권은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를 시작한 지 24시간 7분 만에 토론을 강제 종결하고 26일 오후 6시 국민의힘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야당 의원 183명 전원 찬성으로 방통위법을 통과시켰다. KBS 이사 수를 확대하는 방송법 개정안도 30시간 20분에 걸쳐 필리버스터가 이어졌지만 28일 오전 1시 야당 의원 189명 전원 찬성으로 가결됐다. 방통위법 필리버스터에는 국민의힘 의원 4명, 민주당 2명, 조국혁신당 1명이, 방송법 필리버스터에는 국민의힘 3명, 민주당 2명, 진보당 1명이 참여했다. 민주당 등 야당은 같은 방식으로 방송문화진흥회법과 한국교육방송공사법을 29일과 30일 차례로 처리할 계획이다. 방송 4법 관련 필리버스터는 5박 6일간 이어지면서 총 100시간을 넘길 전망이다.

민주당은 다음 달 1일 본회의에 국민 1인당 최대 35만원을 지급하는 민생지원금법과 노조 불법 파업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를 까다롭게 하는 노란봉투법 개정안도 상정해 처리할 방침이다. 정부·여당은 민생지원금법이 재정 부담을 가중시키고 물가 상승만 유발할 것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노란봉투법도 친노조·반기업법이란 지적을 받았고 21대 국회 때 윤 대통령이 이미 거부권을 행사해 폐기된 적이 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두 법안을 상정할 경우 방송 4법 때처럼 필리버스터를 통해 부당성을 주장할 계획이지만 민주당은 필리버스터를 종료시키고 강행 처리할 게 확실하다.

그래픽=박상훈

하지만 여야가 필리버스터와 강행 처리를 반복해도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재표결 끝에 결국 폐기될 공산이 크다. 주호영 부의장이 “바보들의 행진을 멈추자”고 호소하고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여야가 타협의 여지를 두지 않고 대립하면서 이런 악순환은 계속될 것이란 점이다. 민주당은 대통령이 21대 국회에 이어 최근 또다시 거부권을 행사해 폐기된 해병대원 특검법을 8월 국회 때 재발의하겠다고 했다. 여당이 이번 방송 4법에 이어 민생지원금법, 노란봉투법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하면 윤석열 정부 들어 7번째가 된다. 야당의 일방적 쟁점 법안 강행 처리에 윤 대통령은 취임 후 이미 15차례 거부권 행사로 맞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