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13일 귀성 인사를 하기 위해 서울 용산역을 찾은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해병대원 특검법 처리를 주장해 온 한 해병대 예비역 단체 회원들의 항의를 받았다. 이들은 한 대표에게 다가가 “(한 대표가 해병대원 특검법 발의를) 약속한 지 82일이 지났다. 특검법을 발의해 달라”고 요구했다
‘해병대원 사망사건 수사 외압 의혹’을 수사하고 있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수사에 착수한 지 1년이 넘도록 여전히 결론을 내놓을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서 한 대표의 처지가 난처해지고 있다.
지난 6월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당대표 출마 선언을 하며 “공수처 수사 결과와 상관없이 대법원장이 특검을 추천하는 제3자 해병대원 특검법을 발의하겠다”고 했다. 이후 친한계는 특검법을 반대하는 친윤 주류 등 당내 반발을 의식해 “공수처 수사 결과를 지켜보자”며 한발 후퇴했다. 그런데 공수처 수사가 늘어지고 민주당이 변형된 ‘제3자 특검법’으로 압박하면서 한 대표가 진퇴양난에 빠진 형국이다.
공수처는 작년 8월 수사 외압을 주장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 등의 고발을 접수받아 수사를 시작했다. 지난 1월 국방부와 해병대 등을 압수수색한 공수처는 지난 4~5월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 박경훈 전 국방부 조사본부장 직무대리,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 등 3명을 소환 조사했다. 하지만 이후 속도가 나지 않고 있다.
국민의힘 강승규 의원은 지난 6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오동운 공수처장에게 “이종섭 전 국방장관을 왜 수사하지 않느냐”고 따졌다. 강 의원은 “출국금지한 지가 몇 개월이 됐는데 수사를 안 하고 있느냐”고도 했다. 이에 오 처장은 “원칙에 따라 나머지 수사를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공수처는 이 사건의 핵심을 이종섭 전 장관으로 보고 수사 중이다. 이 전 장관은 지난 3월 공수처에 자진 출석해 약식 조사를 받은 이후 아직 한 차례도 소환되지 않았다. 당시 출국금지 상태에서 호주 대사로 임명됐던 이 전 장관은 출국 11일 만에 자진 귀국하며 신속한 수사를 촉구했다. 이 전 장관의 변호인은 통화에서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공수처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야당이 주장하는 ‘수사 외압 의혹’을 규명하려면 ‘해병대→국방부→대통령실’에 대한 순차 조사가 필요하다. 이 사건의 또 다른 핵심으로 꼽혔던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도 아직 조사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법조계에서는 “사안의 중대성에 비해 수사 속도가 너무 늦다”며 “마치 공수처가 특검법 통과를 기다리는 것 같은 모양새”라고 했다. 이 사건을 지휘하다 지난 1월 퇴임한 김진욱 전 공수처장은 지난 3일 언론 인터뷰에서 “일단 조사가 끝나야 하고 그 다음 기록 정리, 법률 검토, 공소심의위 등 필요한 절차에 한두 달은 걸리는데 조사 대상자가 좀 많이 남은 것 같다”며 “올해 안에 (수사가) 끝날 수 있을지 저도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친한계는 난처한 모습이다. 한 대표는 지난 7월 전당대회 당대표 경선에 출마하면서 해병대원 특검법 발의를 1호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런데 대통령실 입장과 국민의힘의 당론은 “공수처 수사 결과가 미진하면 특검을 하자”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기자회견에서 “(국회 청문회를) 잠깐잠깐 봤는데 이미 거기서 외압의 실체가 없는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것 아닌가”라고도 했다.
이런 가운데 야당은 지난 3일 한 대표의 ‘제3자 추천 특검법’ 제안을 변형해 만든 네 번째 해병대원 특검법을 발의했고, 추석 연휴 직후인 19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키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면서 “약속을 지키라”고 한 대표를 동시에 압박하고 있다. 대법원장이 추천한 특검에 대해 야당의 비토권 조항이 담긴 이 법안에 대해 한 대표는 “달라진 게 없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에서는 “공수처 수사가 늦어질수록 한 대표 입장이 점점 곤란해질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한 대표는 해병대원 특검법 추진과 관련 “내 입장은 그대로”라며 당내 논의를 위해 의원들을 설득하고 있다는 기존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