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은 27일 반도체 산업 연구·개발 종사자에 한해 ‘주 52시간 근무 예외’를 인정하는 내용을 제외한 반도체특별법 제정안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하기로 했다. 주 52시간 예외 조항을 둘러싸고 정부·여당과 이견이 좁혀지지 않자, 민주당이 원하는 대로 반도체특별법 제정 강행 수순에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법안은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180일 심사해야 하는 등 국회 처리에 최장 330일이 걸린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중도층을 의식해 반도체특별법이 필요하다고 외치면서, 실제로는 업계가 절실히 원하는 주 52시간 예외 조항을 제외한 반도체보통법을 장기간 묶어두려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이날 당 회의에서 “국민의힘 몽니에 아무런 진척이 없는 반도체특별법을 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해 추진하기로 결정했다”며 “국민의힘이 제아무리 억지를 부려도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법정 심사 기간 180일이 지나면 지체 없이 처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반도체특별법에서 여야 이견이 해소되지 않은 주 52시간 근로 예외 조항을 제외하고 일단 법 제정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하려는 반도체 특별법엔 정부가 5년마다 반도체산업 지원 기본계획을 수립·시행하도록 하고, 대통령 직속 국가반도체위원회를 신설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반도체 기업에 각종 규제와 세제 관련 혜택을 지원하고, 반도체 기금을 조성할 수 있게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국회법에 따르면 법안이 패스트트랙에 지정되면 상임위 180일, 법사위 90일, 본회의 부의 후 60일 등 최장 330일을 거친 뒤 본회의 표결에 부친다. 반도체특별법 소관 상임위인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 위원장은 이철규 국민의힘 의원이다. 반도체특별법을 패스트트랙에 올리더라도 상임위 심사 기간 180일을 다 채울 공산이 큰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이 위원장을 맡은 법사위와 민주당 출신 우원식 국회의장이 안건 상정 권한을 가진 본회의는 국회법에 규정된 기간을 채우지 않고 민주당 뜻대로 표결에 부칠 가능성이 크다. 상임위 심사 기간(180일)을 넘기면, 민주당이 바로바로 표결 처리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재명 대표는 이날 SBS ‘정치 컨설팅 스토브리그’에 출연해 “(반도체특별법은)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위해 민주당이 낸 법안인데 국민의힘이 52시간제 예외를 넣어야 한다며 태클을 걸고 들어왔다”며 “(이 사안에 있어) 진보·보수·반동 세 기준으로 분류하면 민주당의 태도가 가장 보수적”이라고 했다. 윤종군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만약 윤석열 대통령 탄핵 심판이 헌법재판소에서 인용돼 조기 대선이 치러지면 반도체특별법이 언제 처리될지 모르기 때문에 여당을 압박하기 위해 패스트트랙을 지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주 52시간 예외 조항을 고집하는 국민의힘을 압박하면서, 조기 대선이 현실화할 경우 차기 정권에서 법제화가 다뤄질 공산이 큰 만큼 민주당 안을 일단 패스트트랙에 올려 놓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여야는 반도체특별법 제정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도 연구·개발 종사자의 주 52시간 근무 예외 조항을 두고는 공방을 벌여왔다. 이재명 대표는 한때 고소득 연구직에 한해 주 52시간 근무 예외 적용을 허용할 수 있다는 의사를 내비쳤으나 민주노총 등 노동계와 민주당 내 반발이 커지자 입장을 바꿨다. 이와 관련해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은 지난 20일 이 대표 등이 참석한 여·야·정 국정협의회에서 주 52시간 예외 조항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반도체특별법’이 아니라 ‘반도체 보통법’에 불과하다”고 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초경쟁 체제에 돌입한 반도체 시장의 현실을 고려할 때 330일은 운명을 바꿀 만큼 너무 늦은 시간”이라며 “오히려 슬로 트랙이자 국민을 속이는 민주당 트릭”이라고 밝혔다.
☞패스트 트랙(신속 처리 안건 지정)
국회의 법안 처리가 무한정 지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신속 처리 안건 지정 제도. 국회법 제85조에 따라 소관 상임위 재적 의원 5분의 3 이상이 지정에 동의한 법안에 대해 상임위는 180일, 법사위는 90일 이내에 심사를 마쳐야 한다. 이렇게 법사위를 통과한 법안은 60일 이내 본회의에 상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