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대통령 부친 윤기중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조선일보DB

15일 별세한 윤석열 대통령의 부친 윤기중(92) 연세대 명예교수는 국내 통계학의 기틀을 잡은 원로 학자다. 일찌감치 통계학(1965년), 수리통계학(1974년) 등 총론 교재를 집필해 후학(後學) 양성에 힘썼다.

고인은 통계적 방법을 사용해서 경제 현상을 분석하는 연구를 하면서 통계학과 경제학 분야에서 모두 업적을 남겼다. 윤 교수의 주요 논문으로는 ‘소득 요인별 불평등도 분해(1994년)’, ‘1920년대와 1930년대 한국경제학계 동향(1997년)’, ‘불평등에 대한 재평가(2000년)’, ‘한국의 교육비 탄력성과 불평등(2002년)’ 등이 있다. 윤 교수는 통계학에 기반해 한국 사회의 불평등 추이와 경제 성장과의 관계를 분석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윤 교수는 논문에서 도시근로자 가구의 소득 계층에 따라 물가에 대한 반응 차를 실증 분석했고, 그 결과 반응 차는 저소득층일수록 크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고인은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통계학회장(1977~1979년)과 한국경제학회장(1992~1993년)을 역임했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윤 교수는 공주농고를 거쳐 1956년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학위(1958년)를 받았다. 이후 한양대 경제학과 교수로 있다가 한·일 수교 직후인 1967년 일본 문부성 국비 장학생 1호로 선발돼 일본 히토쓰바시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1968년 귀국 후 연세대 상경대학 교수로 부임해 1997년까지 강단에 섰다.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창립 멤버였으며 1960~1990년대 미국경제학회(AEA)와 일본계량·경제학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지난 2021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윤석열 대통령(당시 전 검찰총장)과 부친 윤기중 연세대 명예교수가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제1동주민센터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투표를 하고 나오는 모습./김지호 기자

윤 교수가 대학에 다니던 1950~1960년대만 해도 석사 학위만으로 교수를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윤 교수도 석사학위만 갖고 교수가 됐다. 당시 석사학위만 있는 교수들을 위해 간단히 논문을 쓰면 박사학위를 주는 ‘구제(舊制) 박사’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윤 교수는 이를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다. 윤 교수는 주변에 “그런 식으로 학위를 받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말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에게 고인은 정신적 기둥이었다고 친지들은 전했다. 윤 대통령이 2013년 국정원 댓글조작 사건 수사로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2021년 대선 출마를 결심할 때 등 인생의 고비마다 부친에게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고인은 윤 대통령이 어릴 때부터 경제학과 관련된 화두를 던지며 독서를 권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이 종종 언급하는 밀턴 프리드만의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도 국내에 번역되기 전 부친 권유로 읽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의 지인은 “고인은 윤 대통령이 어릴 때부터 ‘밥상머리 교육’을 중시했다”고 전했다.

초등학생 시절의 윤석열대통령과 부친 윤기중 연세대 교수/대통령실

고인은 윤 대통령이 대선 출마를 준비할 때 지인인 고(故)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를 소개해 조언을 듣게 했고 출마를 격려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을 그만둔 직후인 2021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부친과 함께 사전투표를 하기도 했다. 윤 대통령은 취임 후인 작년 6월 고인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집무실로 초대해 저녁 식사를 했다. 당시 고인은 윤 대통령에 국민만 바라보며 직무를 잘 수행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고인은 윤 대통령이 검사를 할 때 ‘부정한 돈 받지 마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했다고 한다.

고인은 몇해 전까지 17세기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페티의 저서를 번역하는 일을 손에 놓지 않았고 이로 인해 눈에 무리가 가 치료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이 유학한 일본 히토쓰바시대 측에선 2025년 개교 150주년을 앞두고 학교 역사 편찬을 위해 지난 7월 고인 인터뷰도 타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도 부친이 이 대학에 유학할 때 가족과 함께 방일해 “(도쿄) 우에노역에서 기차를 타고 구니타치역에서 내려서, 아버지의 아파트까지 갔다. 지금도 대학 인근 거리가 눈에 선하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