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교수들 집단 사직서 제출을 하루 앞둔 24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열린 전국의대교수협의회(전의교협) 회장단 간담회에 참석한 뒤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정하 국민의힘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보단장,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유의동 정책위의장./이덕훈 기자

전국 의대 교수들이 예고한 집단 사직서 제출을 하루 앞둔 24일. 대통령실은 이날 오전까지도 병원으로 복귀하지 않은 전공의(專攻醫)에 대한 면허정지 조치를 공언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오전 8시 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방침과 관련해 “5년 정도 이후에 필요하다면 (증원) 인원에 대해서 좀 더 (논의해) 볼 수 있지만 지금 당장은 인원을 변경시킬 계획은 없다”고 했다. 성 실장은 미복귀 전공의에 대한 면허정지 등 행정 처분과 사법 처리도 불가피하다고 했다. 오는 26일로 다가온 첫 면허정지 조치가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예고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오전 10시쯤 당 선대위 회의에서 오후에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전의교협) 지도부와 면담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한 위원장은 그간 정부의 의료 개혁 방침에 동조하면서 원칙 대응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미복귀 전공의에 대한 면허정지 조치가 예정대로 진행될 경우 의대 교수들까지 사직서 제출에 나서면서 의료 공백 사태가 본격화할 수 있다고 보고 중재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전의교협 간부가 “정부의 강경 방침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며 한 위원장과 만남을 취소하려 했지만, 한 위원장이 “나를 믿어달라”며 설득해 비공개 회동이 성사됐다고 한다.

이날 간담회에서 전의교협은 전공의에 대한 처분 완화는 요구했지만, ‘의대 2000명 증원’ 백지화는 요청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정부와 의료계 갈등의 핵심은 의대 정원이었다. 정부는 2000명 증원을 고수했고, 의료계는 원점 재검토를 요구하며 대치해 왔다. 이를 두고 일각에 “의료계가 의대 증원과 관련해 전보다 유연한 입장을 보인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다른 쪽에선 “민감한 정원 문제는 향후 협의체에서 논의하려는 것”이란 지적이 나왔다. 또 전의교협은 이 자리에서 “(복지부에) 품격 있는 언어를 쓰는 고위 공직자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화가 어려울 수 있다”는 취지의 요구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의료계에선 “그동안 전공의들에 대한 형사 처벌 등 과격한 발언을 많이 해 의사들의 반발을 산 복지부 조규홍 장관과 박민수 2차관의 교체를 요구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정부는 지난 20일 2025학년도 전국 의대별 증원 배정안을 발표하는 등 후퇴는 없다는 태도를 고수해 왔다. 정부는 특히 업무 개시 명령에도 요지부동인 전공의들의 면허를 당장 이번 주부터 정지시킨다는 계획이다. 이에 맞서 전국 의대 40곳 중 39곳이 참여하는 전의교협은 지난 21일 “다음 달부터 외래 진료를 최소화한다”고 밝혔다.

한 위원장은 정부와 의료계가 정면충돌로 치달으면 의료 개혁에 긍정적인 여론이 부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4·10 총선이 코앞에 다가오자 여당 내에서도 사태를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인천 동·미추홀을에 출마한 윤상현 의원은 전날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의료 대란에 국민은 지쳐가고 있다”며 여당 지도부의 중재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왔다. 의대 교수 일각에서도 대화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왔다. 19개 의대 교수들이 참여하는 별도의 의대교수 비대위를 주도하는 방재승 서울대 의대 교수가 지난 21일 “정부가 전공의에 대한 처벌을 풀어주고 대화의 장을 만들면 사직을 철회할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이날 한 위원장과 전의교협 지도부 면담도 교수 측이 먼저 제안했다고 한다.

주목되는 건 대통령실의 기조 변화 조짐이다. 윤 대통령을 위시한 대통령실은 “의료 개혁에 절대 후퇴는 없다”며 원칙 대응 기조를 거듭 밝혀왔다. 그런데 한 위원장이 전의교협 지도부를 만나고 미복귀 전공의에 대한 유연한 조치와 대화체 구성을 요청하자, 윤 대통령은 한덕수 총리에게 관련 지시를 함으로써 한 위원장 요청을 수용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용산 대통령실에서 참모진과 회의를 하다 한 위원장의 요청을 보고받고 바로 한 총리에게 지시를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 관계자는 “한 위원장과 대통령실 참모진 간에 협의가 있었고, 이관섭 대통령 비서실장 등도 대통령에게 대화 필요성을 건의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변수는 전공의들의 복귀 여부다. 특히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에 대해선 정부도 여전히 완강한 상황에서 전공의들이 면허정지 유예만으로 복귀할지는 미지수란 관측도 많다. 여권 관계자는 “일단 양측이 한 테이블에 앉아 협의를 시작하는 게 중요하다”며 “협의 과정에서 양측 간 건설적인 대안이 도출될 수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