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지난 8월 31일 국회 외통위 회의 도중 유대종 외교부 기조실장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외교부가 2017년 말 발생한 주(駐)뉴질랜드 K 외교관의 현지 직원 성추행 사건 관련 인사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위원 총 3명 중 2명을 K 외교관의 직속 부하 직원으로 채웠던 것으로 10일 확인됐다. 가해자의 부하 직원에게 상급자의 비위를 조사하고 징계 여부와 수위를 결정하라고 했던 것이다.

사건 발생 초기 ‘대사관 인사위’가 부적절하게 꾸려지면서 CCTV 영상 등 결정적 증거물 확보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외교부는 또 최근 한·뉴질랜드 정상 통화에서 이번 사건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항의를 받는 초유의 외교 참사를 자초하고 이에 국회 외통위에서 관련 질의를 받으면서도 “엉덩이뿐 아니라 ‘성기’ 접촉도 있었다”는 추가 혐의 진술을 확보한 사실은 공개하지 않았다. 대신 외교부는 익명의 당국자를 내세워 이 진술과 관련해 “피해자가 말을 바꾸더라” “합의금을 요구하더라”라며 가해자에게 유리한 여론전을 펴는 태도를 보였다.

이번 사건을 조사한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는 최근 피해자의 진정 내용이 ‘인정’된다면서 외교부가 가해자 부하들로 인사위를 꾸린 점과 관련 “공정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고 피해자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될 우려도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1200만원을 지급하고, 외교부는 성 범죄 발생시 조사 및 구제에 대한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매뉴얼을 마련하라”고 권고 통보했다.

한국외교관 K씨의 성추행 스캔들에 대해 뉴질랜드 방송이 보도한 장면.

본지가 입수한 인권위의 이번 사건 결정문에 따르면, K 외교관 성 비위 사건에 대한 첫 인사위원회는 2018년 1월 19일 주뉴질랜드 대사관에서 열렸다. 2017년 11~12월 세 차례에 걸쳐 K 외교관이 동성인 대사관 현지 남자 직원의 민감한 신체 부위를 만진 지 약 두 달 뒤이다. 이 인사위원회는 뉴질랜드 공관원들로만 구성됐다. 위원장은 주뉴질랜드 대사, 나머지 위원 2명도 대사관 직원들이었다. 위원회는 대사관 고충담당 직원이 자체 조사한 내용, 가해자와 피해자의 진술 등을 바탕으로 징계 여부를 결정했다. 피해자가 정확한 일시와 피해 상황을 상세히 진술하고, 가해자도 성희롱 혐의는 부인하면서도 신체 접촉 사실은 인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 인사위원회는 피해자에게 특별휴가를 가도록 하고 가해자에게는 경고 조치만 내리기로 결정했다. 외교부는 이후 피해자가 재차 문제 제기를 하자 본부에서 2019년 초 외부 인사를 포함한 인사위원회를 열고 K외교관에게 ‘감봉 1개월’ 처분을 내렸다. 그간 외교부는 K외교관을 ‘감봉 1개월’의 솜방망이 징계를 했다고 비판을 받았지만, 처음엔 이보다도 가벼운 경고 조치만 했던 것이다. 피해자가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으면 외부 인사가 포함된 인사위원회가 2019년 열리지도 못했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이와 관련, 인권위는 대사관에 성희롱 조사·처리 규정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가해자를 상급자로 둔 대사관 공관원으로 인사위를 꾸린 것은 불공정 시비에 걸릴 수 있다고 꼬집었다. 인권위는 결정문에서 “이 인사위에서 가해자는 ‘경고’ 조치만 받았다”면서 “피해자는 이를 정당한 조치 또는 성희롱 피해자 보호에 대한 결과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피해자가 (대사관에 최초 신고한 이후에) 외교부 특별 감사 때 다시 신고했다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월말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와 통화하는 모습.

결정문에 따르면, K 외교관은 2017년 11월 웰링턴 한 빌딩의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대사관이 있는 11층에서 내리면서 W의 배 부위를 만지고 동시에 성기도 움켜쥔 혐의를 받고 있다. 앞서 같은 달 K 외교관이 자신의 사무실에 W씨를 불러 그의 엉덩이를 불쑥 만지는 1차 피해가 발생한 지 불과 수일 뒤에 2차 피해가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인권위는 사건 초기 이와 관련한 CCTV 영상 등 증거물이 확보되지 않았고 가해자는 혐의를 전면 부인해, 추가 진술 내용이 최종적으로 확인되진 않았다고 했다. 외교부는 이번 사건을 재조사하기보다는 양측이 합의하는 쪽으로 중재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본지는 사건 초기 대사관 인사위가 가해자 부하들로 구성된 배경과 피해자의 추가 진술 등과 관련 외교부의 입장을 묻고자 수차례에 걸쳐 연락했다. 하지만 외교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외교부가 익명의 당국자를 내세워 외교부와 가해자에게는 유리하고 피해자에게는 불리한 내용은 브리핑을 자처하는 등 언론에 적극적으로 알리면서도, 정작 이번 사태를 부른 외교부의 부실 대처와 관련해선 국민에게 진상을 알리기보다는 쉬쉬하며 숨기려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직 고위 외교관은 “성추행 피해자는 K외교관에 피해를 한번 입고, 외교부의 미흡한 대처로 또한번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면서 “외교부가 계속 사건을 축소하고 초기 자신들의 부실 대처를 적당히 덮으려는 태도를 보인다면 문제는 더 커지고 신뢰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9년 당시 주뉴질랜드 한국 대사의 아내가 한국 외교관 K의 성추행 피해자인 뉴질랜드인 가족에게 위로 편지와 함께 준 카카오프렌즈 인형. 이 편지를 보면, 대사의 아내는 “(가해자인) K 참사관과의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면서 “어쩌다 그런 일이 생겼는지…빨리 좋아지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대사님도 달리 어쩔 도리가 없고 해서 고민이 많다”면서 “순조로이 해결되길 기원하곤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 한국에 다녀오며 (피해자 자녀에게) 주면 좋겠다 싶어 인형 하나를 샀다”면서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란다”고 했다. 현재 국내 근무 중인 이 대사는 2017년말 사건 신고 접수 당시 가해자와 피해자를 신속히 분리하지 않고 한 건물에서 근무하도록 하는 등 관리 부실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청와대 조사 결과 나타났다. /노석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