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1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특파원단과 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외교부가 외교관 K씨의 뉴질랜드인 성추행 사건에 대한 중재(仲裁) 절차를 재개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21일 알려졌다. 외교 소식통은 “외교부가 최근 K 외교관과 성추행 피해자인 주뉴질랜드 한국 대사관 행정직원 W씨 측에 중재 재개 통보를 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외교부의 이 같은 결정은 다음 달 국정감사에서 K 외교관과 2017년 사건 당시 주뉴질랜드 한국 대사 등 외교부 관계자들이 증인으로 줄줄이 소환될 가운데 나왔다.

외교부가 이번 사건을 재조사하기보다는 사건 당사자 간 합의를 이끌어내 정리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외교부는 올 초 성추행 가해자·피해자 간 중재를 진행하다가 지난 4월 전면 중단했다. 외교부가 K 외교관에 대한 뉴질랜드 법원의 체포영장 집행 협조를 외교관 면책 특권 등을 이유로 거부한 사실이 현지 언론을 통해 보도되던 무렵이다.

뉴질랜드 주재 한국 대사관 현지 직원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는 한국 외교관 K씨.

국가인권위원회는 최근 피해자 W씨의 진정을 ‘인용’ 결정하고 외교부의 이번 사건 대응이 미흡했다며 개선 방안을 마련할 것으로 권고 통보했다.

외교부는 2017년말 발생한 주(駐)뉴질랜드 K 외교관의 현지 직원 W씨 성추행 사건 관련 인사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위원 총 3명(간사 불포함) 중 2명을 K 외교관의 직속 부하 직원으로 채웠다. 가해자의 부하 직원에게 상급자의 비위를 조사하고 징계 여부와 수위를 결정하라고 했던 것이다.

인권위는 또 결정문에서 “(피해자가) 휴가에서 복귀한 직후 일정 기간 K 외교관과 같은 공간에서 근무했던 점, 사건 발생 초 휴가 사용과 의료 지원에서도 원활하지 않았던 점, K 외교관이 피해자에게 연락해 업무 지시를 하는 등 실질적 분리조치가 되지 않았던 점 등으로 인해 성희롱 피해자 W씨는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게다가 K 외교관을 상급자로 둔 대사관 공관원들이 인사위 위원으로 구성돼 이 사건을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은 결과와 상관없이 공정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고, 이는 성희롱 피해자인 W씨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할 우려도 상당하다”고 했다.

한국외교관 K씨의 성추행 스캔들에 대해 뉴질랜드 방송이 보도한 장면.

그러면서 “결과적으로 대사관 인사위에서 K 외교관은 ‘경고’ 조치만을 받았으며, 진정인은 이를 정당한 조치 또는 성희롱 피해자 보호에 대한 결과라고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피해자 W씨가 외교부 특별감사 때 다시 신고했다는 것은 이를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인권위는 결정문에서 “재외 공관 인적구성의 특성으로 자체적으로 인사위 구성할 경우, 성희롱 사건 당사자들과 관련이 있는 직원들이 진행할 수밖에 없고, 더구나 성희롱 가해자는 상급자일 가능성이 높은 반면, 인사위 위원들은 성희롱 가해자보다 직급이 낮은 직원들로 구성될 우려가 있는바 이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월말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와 통화하는 모습.

인권위는 소결에서 “이번 사건 진정인(가해자 W씨)·피진정인(K 외교관) 모두 남성이나, 성희롱의 당사자가 반드시 이성 간이어야 인정되는 것은 아니고, 동성 간에도 성적 함의가 담긴 피진정인의 언동으로 인하여 진정인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꼈을 경우 성희롱이 성립된다”고 했다.

이어 “피진정인이 접촉한 엉덩이나 배, 가슴 부위는 남성에게도 성적으로 민감한 부위이며, 이러한 부위를 접촉하는 행위는 동성 간이라 하더라도 직장 내에서 격려의 마음이나 친밀감을 표현하는 수준을 넘어 진정인에게 성적 굴욕감과 혐오감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외무 공무원은 주재국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여 직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인 바, 이들의 성적 비위행위는 일반 국민의 검증과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 책임이 개인에게 그치지 않고 국가에도 직결되므로 외교관으로서의 책임이 무겁다 할 것이어서, 재외공관 내 성희롱 사건 조사와 처리는 더욱 철저히 진행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를 위해서는 가해자를 엄중히 징계하고, 나아가 재발방지를 위해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2019년 당시 주뉴질랜드 한국 대사의 아내가 한국 외교관 K의 성추행 피해자인 뉴질랜드인 가족에게 위로 편지와 함께 준 카카오프렌즈 인형. 이 편지를 보면, 대사의 아내는 “(가해자인) K 참사관과의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면서 “어쩌다 그런 일이 생겼는지…빨리 좋아지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대사님도 달리 어쩔 도리가 없고 해서 고민이 많다”면서 “순조로이 해결되길 기원하곤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 한국에 다녀오며 (피해자 자녀에게) 주면 좋겠다 싶어 인형 하나를 샀다”면서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란다”고 했다. 현재 국내 근무 중인 이 대사는 2017년말 사건 신고 접수 당시 가해자와 피해자를 신속히 분리하지 않고 한 건물에서 근무하도록 하는 등 관리 부실의 책임이 있는 것으로 청와대 조사 결과 나타났다. /노석조 기자

인권위는 “피진정인은 당시 참사관이자 영사로서 성희롱을 예방해야 할 책임이 있음에도, 오히려 행정 직원을 상대로 반복해 신체 접촉을 했다”면서 “이로 인해 진정인은 장기간 근무할 수 없을 만큼의 근로 환경이 악화했을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피해가 상당하다고 판단된다”고 했다.

이어 “피진정인 2(외교부 장관)는 반복해 신체접촉을 한 피진정인 1(K 외교관)에 대해 조치를 미흡하게 진행했고, 피진정인 1과 진정인을 충분히 분리조치하지 않은 점, 재외공관 내 인사위 구성이 공정성을 담보하고 있지 못한 점, 또한 이러한 절차를 모두 포괄하는 재외공관 내 성희롱 조사 및 처리 절차를 규정한 지침이나 매뉴얼이 부재한 점 등에 대해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고 했다.

한국 외교관 성추행 사건에 대해 뉴질랜드 방송 장면. /뉴시스

하지만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이런 인권위 결정이 나왔음에도 지난 15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인권위 결과만 가지고 봤을 때 제가 사과할 사안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강 장관은 국민의힘 박진 의원의 질의에 “제대로 조사된 상황이 아니다. 가해자의 자기 방어권도 제대로 행사된 것이 아닌 상황”이라며 “어디에 진실이 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강 장관은 박 의원이 ‘공개적으로 사과할 생각이 없나’라고 질문했지만 “그럴 생각은 없다”고 했다.

질의하는 박진 국민의힘 의원 /뉴시스

본지는 이번 중재 재개 등 이번 사건 관련한 외교부의 입장을 묻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박윤주 외교부 인사기획관 등에게 연락했다. 하지만 이들은 응하지 않았다.

베트남을 공식 방문하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17일 오전 인천공항에서 출국장으로 가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