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훈 국가안보실장이 25일 청와대 춘추관 대브리핑 룸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시스

청와대가 25일 공개한 북한의 전통문에 담긴 공무원 A씨의 사살·시신 훼손 정황은 전반적으로 우리 군의 주장과 배치된다. 우리 군은 북한이 A씨를 사살하고 시신을 불태워 훼손하는 과정에서 비인도적, 비윤리적 상황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전통문에 따르면 북한은 접경 지역에서 정해진 절차를 따랐을 뿐 큰 잘못이 아니란 취지로 주장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전통문을 통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고도 했다. 마치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을 만한 행동은 없었던 것처럼 전통문을 작성한 것이다. 군에서는 “북한 특유의 이중 플레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북한 전통문과 우리 군의 분석은 A씨를 향한 북한의 학대·사살과 관련된 세부 사안들에서 결정적으로 엇갈린다. 우리 군은 북측 선박이 6시간 넘게 A씨가 타고온 부유물을 밧줄에 연결해 끌고 다녔고, 첫 발견 뒤 한참 후에야 사격을 한 것으로 봤다. 하지만 북측은 이런 과정은 생략한 채 A씨가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오자 통상적 경고 사격을 한 것처럼 설명했다. 북한은 “단속 명령에 계속 불응해 더 접근하면서 2발의 공탄(공포탄)을 쏘자 정체불명의 대상이 도주할 듯한 상황이 조성됐다”며 “이에 10여발의 총탄으로 불법 침입자를 향해 사격했으며 이때의 거리는 40~50m였다”고 했다.

25일 오전 인천 옹진군 연평도 해상 해군 고속정 뒤로 북한 등산곶의 모습이 보인다. / 장련성 기자

북한은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NLL 월선에 대응한 일반적 상황 조치였음을 주장한 것으로 풀이됐다. 6시간 동안 밧줄로 A씨를 선박 인근에 묶어둔 채 ‘해상 취조’한 정황은 전혀 설명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행위가 ‘자위권적 대응’이었음을 일방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우리 군은 첩보를 통해 A씨가 수시간 동안 코로나 감염원 취급을 받으며 급기야 사살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당한 것으로 봤는데 이는 지극히 이례적이었다. 군 관계자가 “북한이 그런 행동을 할 줄 몰랐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A씨의 시신 훼손에 대해서도 남북의 주장은 극명히 엇갈린다. 우리 군은 북측이 22일 오후 10시쯤 사살된 A씨의 시신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으며 그 불이 40분간 관측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북한은 “사격 후 수색하였으나 침입자(A씨)는 부유물에 없었으며 많은 양의 혈흔이 확인됐다”며 “불법 침입자가 사살된 것으로 판단해 침입자가 타고 있던 부유물은 국가방역 비상 대책에 따라 해상 현지에서 소각했다”고 했다. 시신이 아닌 부유물을 불태웠다는 것이다.

피격 공무원이 탔던 배 조사중인 해경 - 해양경찰이 25일 인천 옹진군 연평도 해상에서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를 조사하고 있다. 지난 22일 북한군에 사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인 A씨는 이 선박을 타고 있다가 실종됐다. /뉴시스

신종우 한국국방안보포럼 전문연구위원은 “24시간 이상 거친 바다에서 부유물을 붙잡고 표류한 사람이 경비정 앞에서 도주를 시도해 경계근무 규정에 따라 사살을 했다는 것, 구명조끼를 착용했는데 총격에 사람은 물속에 가라앉고 부유물만 남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며 “부유물을 잡고 탈진 상태에 빠진 사람이 북한군을 위협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며, 북한의 주장은 우리 국민 살인을 정당화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한 궤변일 뿐”이라고 했다. 군 관계자는 “상식적으로 튜브 하나 태우는 데 40분이나 걸린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이 전통문을 통해 밝혔다는 ‘사과’의 진정성도 의심됐다. 서훈 국가안보실장은 북측 통지문에 우리 국민에 대한 사과와 유감 표명, 재발 방지 내용이 있다고 했지만 북측은 이런 사실을 아직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김정은은 ‘사과’라는 표현 대신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서 실장은 북측이 신속하게 응답했다고 강조했지만 북한은 22일 사건 발생 후 이틀 넘도록 침묵하다 전날 우리 정부가 강력 규탄에 나서자 이날 전통문을 보냈다.

남주홍 경기대 교수는 “김정은의 사과는 오래된 북한식 이중 플레이의 재연”이라며 “최고 통치자가 개입된 만행임이 명확한 1976년 도끼 만행 사건 등이 발생했을 때도 불리하다 싶으면 유감만 표명해 넘어가거나 아랫사람들이 벌인 일이라며 발뺌해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