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7일 예정됐던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부 장관의 방한(訪韓)이 사흘을 앞둔 4일 취소되면서 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외교가에선 “정부가 대북 정책을 놓고 제재를 강조하는 미국과 엇박자를 내고, 미·중 갈등에서도 중국을 의식해 미측 요구에 모호한 태도를 보이다가 미국의 우선 방문지에서 뒤로 밀려났다”는 말이 나왔다. 전직 고위 외교관은 “폼페이오 장관의 이번 아시아 순방은 대중(對中) 전략에 따른 것”이라면서 “정부가 폼페이오 장관의 방한을 대북(對北) 메시지용으로 활용하려고만 하고 정작 미국이 원하는 것은 경시해 이런 일을 자초한 것”이라고 했다.
정부는 이날 오전 11시 20분쯤 입장문을 내고 “불가피한 사정으로 방한이 연기돼 아쉽게 생각한다”면서 “조속한 시일 내 다시 방한이 추진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외신들이 이날 미 국무부발로 폼페이오 장관이 이달 4~6일 3일 일정으로 일본만 방문하고 당초 예정된 한국·몽골 방문은 연기된다는 소식을 타전한 지 약 1시간 뒤였다. 외교부는 전날 밤까지도 폼페이오 장관의 방한 일정은 변동이 없다는 입장을 외부에 밝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소식통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코로나 확진 소식에도 폼페이오 장관의 아시아 순방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될 것으로 알았는데 결국 방한이 갑작스레 취소됐다”면서 “‘10월 외교 일정’ 차질이 불가피하게 됐다”고 말했다.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강경화 장관은 작년 12월 이후 10개월 만에 이뤄질 이번 한미 장관 회담에 큰 기대를 걸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 장관은 대북 정책, 코로나 방역 협력 등을 놓고 공동 발표문 등을 낼 방안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폼페이오 장관이 이번에 한국·몽골을 건너뛰면서도 방일하는 주 목적은 ‘쿼드 외교장관 회의’ 때문이다. 미 국무부는 “폼페이오 장관은 도쿄에서 쿼드 외교장관 회의를 가질 것”이라면서 “(이 회의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긴박한 현안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폼페이오 장관의 이번 방한 연기 결정은 미국의 대중 정책에 한국이 불참하는 등 예전 같지 않은 한미 동맹의 현주소를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최근 미국의 초당적 대외 정책인 대중 인도·태평양 전략과 관련,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 미 조야(朝野)의 우려를 샀다. 특히 강 장관은 지난달 25일 미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역점 추진하는 전략 다자 안보 협의체 ‘쿼드(Quad)’와 관련,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다”라고 공개 발언해 논란을 불렀다. 이에 외교가에선 “한국 정부가 미·중 사이에서 미국의 동맹보다는 ‘중립국’을 자처하기로 작심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앞서 이수혁 주미 대사도 “경제는 중국과, 안보는 미국과 함께한다”고 말해 주미 대사로서 부적절한 발언이란 비판을 받았다.
미국은 일본 등과 협력해 쿼드 체제를 주축으로 대중·대북 전략을 강화하고 있다. 미 태평양 공군 사령부 발표에 따르면 B-1B 2대는 지난달 30일 태평양 괌 앤더슨 공군기지를 이륙해 동해에서 일본 항공자위대 소속 F-15J 전투기와 연합 훈련을 했다. 오는 10일 북한의 당 창건 75주년 기념 행사를 앞두고 미국의 서해 정찰 활동도 강화되고 있다. 항공기 추적 사이트 ‘노 콜사인’ 에 따르면 미 해군 정찰기 EP-3E가 지난 2일 오후 인천 근방의 서해 상공에 나타난 것으로 파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