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일본을 방문한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10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를 만날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TBS방송은 박 원장이 일본 총리 관저를 찾아 스가 총리를 예방하는 쪽으로 양측 간에 조율이 이뤄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스가 총리가 지난 9월 취임 후 우리 정부의 고위급 인사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정치인 출신인 박 원장이 사실상 ‘문재인 대통령 특사(特使)’ 자격으로 스가 총리를 면담하는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박 원장의 이번 방일은 단순 방문을 넘어 경색된 한·일 관계에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있다는 게 외교가의 중론이다. 한국이 올해 의장국을 맡고 있는 한·중·일 3국 정상회의 연말 개최, 내년 북한 참가가 주목되는 도쿄올림픽 관련 협력 방안, 강제징용 등 한·일 갈등 타개책 모색 등 크게 3가지 이슈가 박 원장과 스가 총리 면담에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
박 원장은 스가 총리에게 한·일 관계 개선과 관련한 문 대통령 입장을 전달할 예정이다. 외교가 일각에선 박 원장이 ‘여러 현안과 장애물이 있지만 큰 틀에서 관계 개선을 하자’는 내용의 문 대통령 친서를 전달할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도쿄의 외교 소식통은 “박 원장이 문 대통령 지시에 따라 12월 서울에서 개최될 한·중·일 3국 정상회의에 스가 총리가 참석해 달라고 요청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스가 총리는 앞서 한국 대법원 판결로 압류된 일본 기업 자산을 매각하지 않는다고 약속해야 방한할 수 있다는 입장을 우리 정부에 통보했다. 박 원장이 이른바 ‘문희상안(案)’을 일부 손본 절충안을 일본 정부에 다시 제시할 가능성도 있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제안한 안은 한·일 양국 기업과 국민(1+1+α)이 자발적으로 낸 성금으로 재단을 설립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위자료 또는 위로금을 지급하자는 내용이다. 일본 정부는 이에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문희상안은 일본의 사죄·배상 책임을 면해 주는 측면이 있어, ‘피해자 중심주의’를 중시하는 우리 정부가 수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는데 박 원장이 다시 이를 손봐 논의 테이블에 올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박 원장은 내년 도쿄올림픽과 관련한 한·일 협력 방안도 스가 총리와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스가 총리는 최근 북한과 관계 개선 가능성을 시사하며 도쿄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하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내놨다. 외교 소식통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으로 남북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튼 경험이 있는 우리 정부로선 도쿄올림픽은 북한을 국제사회로 이끌어낼 기회로 보고 있고, 이를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일본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8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스가 정권 이인자인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자민당 간사장을 만났다. 그는 니카이 간사장과 저녁 식사를 하며 징용 배상 문제 등으로 악화한 한·일 관계를 개선하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은 지난 8월에도 오사카에서 만나 양국 관계 개선 방안을 논의했다. 일각에선 박 원장이 “'문재인·스가 선언'을 해보면 어떻겠냐”는 아이디어를 제안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니카이 간사장은 지한파(知韓派)로 2018년에는 자신이 이끄는 니카이파 의원 40여 명과 지방의회 의원 등 300명을 이끌고 서울에서 연수회를 열기도 했다. 한·일 경제협력에 기여한 공로로 2015년엔 한국중소기업중앙회에서 감사패도 받았다.
박 원장은 9일에는 기타무라 시게루(北村滋) 국가안전보장국장과 자신의 카운터파트인 다키자와 히로아키(瀧澤裕昭) 내각정보관을 만나 조 바이든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의 당선 및 북한의 움직임과 관련한 정보도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