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3국의 외교 수장들은 27일 “위기일수록 3국 협력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과거사 문제와 미·중 갈등의 여파로 3국 관계가 다소 주춤한 상황이지만 한·중·일이 코로나 팬데믹(대유행)을 비롯한 3국 공통의 위기 극복을 위해서라도 조속히 머리를 맞대야 한다는 데 공감한 것이다. 한·중·일 3국 협력 사무국(TCS)은 이날 출범 1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국제포럼을 열었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기조연설에서 “3국 정상회의가 1990년대 말 아시아 금융 위기 극복 과정에서 탄생했듯이 3국 협력은 위기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해 왔다”며 “2년에 걸쳐 코로나 확산세가 지속되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한·중·일 협력은 더욱 중요해졌다”고 했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이날 공개된 축사에서 “TCS는 유동적인 지역 정세 속에서도 지난 10년간 다양한 분야에서 3국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며 “전례 없는 세계적 감염병 확산으로 어느 때보다 세 나라 간 긴밀한 협력과 연대가 필요한 시기”라고 했다.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일본 외무상은 “3국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러 제약을 겪는 상황에서도 온라인 방식으로 보건·물류·금융·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진전시켰다”고 했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은 “3국 협력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 경제 회복의 강력한 엔진 역할을 하도록 일본·한국과 노력하겠다”고 했다.
연단에 선 3국 대표들은 ‘뼈 있는 말’도 일부 주고받았다. 최종문 외교부 2차관은 “세 나라는 막중한 시대적 사명을 안고 3국 협력의 도약과 정체 사이의 갈림길에 서 있다”며 “3국이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 지난 선택을 아쉬워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경색된 한일 관계의 영향으로 2년째 한·중·일 정상회의가 열리지 못하는 등 실질적 3국 협력이 정체되고 있는 현실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됐다.
싱하이밍(邢海明) 주한중국대사는 “3국은 다자주의를 기본 원칙으로 삼아 평화·발전·공평·정의라는 인류 공동의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며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패도(覇道)에 반대하고 공도(公道)를 신봉해야 한다”고 했다. ‘패도’는 미국을 비판할 때 쓰는 표현으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도 지난 20일 보아오 포럼에서 미국을 우회 비판하며 “세계에는 공도가 필요하지 패도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다. 싱 대사의 발언은 미국의 반중(反中) 캠페인에 동참 중인 일본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됐다.
화상으로 참여한 청융화(程永華) 전 주일중국대사는 최근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결정으로 불거진 해양 환경 문제를 거론하며 “중국 인민들이 크게 주목한다”고 했다. 이어 “해양은 생명의 요람이자 자원의 보고로 인류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뒷받침한다”며 “해양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를 적절히 처리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보시 고이치(相星孝一) 주한일본대사는 3국 협력 분야의 사례로 해양 환경을 꼽긴 했지만 폐플라스틱 처리 문제로 논의를 국한했다. 외교관 출신으로 TCS 초대 사무차장을 지낸 마쓰카와 루이(松川るい) 일본 참의원 의원은 “TCS가 출범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3국 간의 양자 관계는 최상이 아니다. 오히려 더 악화한 측면도 있다”고 했다.
TCS 출범 당시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김성환 동아시아재단 이사장은 “양자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3국 협력을 통해 완화·해결되길 바랐는데 오히려 양자 갈등으로 인해 3국 협력 자체가 어려워지는 상황에 처하곤 했다”며 “제일 시급한 과제는 3국 국민 간의 상호 신뢰와 호감도를 높이는 일”이라고 했다.
이날 열린 TCS 창설 10주년 기념 포럼은 조선일보와 일본 아사히신문, 중국 인민일보가 공동 후원했다. 미치가미 히사시(道上尙史) TCS 사무총장은 개회사에서 “양자 관계의 부침과 무관하게 3국 협력이 훌륭하게 기능해 왔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며 분야별로 21개의 장관급 회의체가 가동되는 것을 강조했다.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은 축사에서 “갈등과 분열로는 미래 세대에게 행복한 동북아를 물려줄 수 없다”며 “지금과 같은 미증유의 보건 위기가 3국 협력의 새로운 계기”라고 했다.
☞한중일 3국 협력사무국(TCS)
한국, 중국, 일본 3국 평화와 공동 번영의 비전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국제기구. 3국 정부의 협정에 따라 2011년 9월 서울에 공식으로 설립됐다. 3국 간 협의체 지원, 연구 및 데이터베이스 구축, 상호 이해 증진 협력 사업 등을 하고 있다. 3국 외교관들이 사무총장을 돌아가면서 맡으며, 예산도 3국 정부가 3분의 1씩 부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