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공군 20전투비행단 소속 여성 부사관(중사)은 피해 직후 당국에 신고하고 22차례나 상담을 받았으나 군 당국은 제대로 조치하지 않은 것으로 3일 나타났다. 오히려 사건을 은폐하고 피해자를 회유하려 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국민의힘 이채익 의원과 본지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여성 부사관 A씨는 지난 3월 2일 회식 자리에 불려나가 선임 남성 부사관 B씨에게 성추행을 당했고, 다음 날 해당 부대 지휘관에게 피해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나 공군은 이틀 후에 피해자 조사를 실시했고, 가해자 B씨에 대한 조사는 17일에야 개시했다. 사건 발생 15일 뒤였다. B씨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부인했다.
이 과정에서 A씨와 A씨 남편 등이 부대 관계자들에게 광범위한 은폐·회유 제안을 받았다는 것이 유족 변호인 주장이다. 문제의 회식 자리는 A씨 상관(상사) 지인의 개업식이었다. 부사관 4명, 민간인 1명이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성추행 사실을 A씨에게 들은 상사는 ‘코로나 시국이니 없던 일로 하자’며 회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 변호인은 “방역 수칙을 위반하고 회식을 한 것을 감추려 한 데서 은폐, 회유가 시작됐다”고 했다. 이후 상관들은 A씨에게 ‘여러 사람 다친다’ ‘가해자 인생을 생각해 한번 용서해라’ ’살면서 한번쯤 겪는 일’이라고 회유·압박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가해자 분리 원칙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공군은 성추행 정황이 담긴 차량 블랙박스 파일을 확보하고도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A씨는 피해 직후 “(성추행)하지 말아달라. 앞으로 저를 어떻게 보려고 이러느냐” 등 자신의 절박한 목소리가 담긴 블랙박스 파일을 공군에 제출했다. 그런데도 군은 B씨에 대한 조사를 즉각 개시하지 않았다. A씨는 부대 민간인 성 고충 상담관에게 22회 상담을 받으며 ‘살고 싶지 않다'는 문자를 보냈다. A씨는 결국 지난달 22일 극단적 선택을 했다.
공군은 언론 보도로 A씨 사건이 알려진 뒤에야 B씨 휴대전화를 확보했다. 사건 발생 3개월 만이다. 증거 인멸 등 가능성을 아예 무시한 것이다. 이 휴대전화에는 회유·은폐 정황을 입증할 만한 통화·메시지 내용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채익 의원은 “공군은 최소한 피해자 조사를 실시한 3월 5일에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 조처를 해야 했음에도 2주일이나 뭉개다 피해자가 2차 가해를 받게 한 것”이라고 했다. 유족 측은 이날 지휘관인 20전투비행단장(준장)의 2차 가해 가담 가능성도 시사했다.
이번 사건 과정에선 ▲상관이 사적 목적(지인 개업식 축하)에 부하 강제 동원 ▲코로나 방역 수칙 위반 ▲부대 전체가 피해를 본다며 회유 ▲피해자 조사 지연 ▲극히 일부만 알고 있어야 할 성추행 피해 사실 전파 등 군의 문제점이 총체적으로 드러났다. 군 안팎에선 “덮고 뭉개고 봐주는 공군 특유의 폐쇄적 조직 문화가 참사를 불렀다”는 지적도 나왔다. A씨 성추행 사건이 발생한 지난 3월은 공군 3훈련비행단장(준장)의 ‘노 마스크' 축구, 부부 동반 골프 등 방역 수칙 위반 등이 논란이 된 시기였다. 군 관계자는 “이럴 때 다른 부대에서 회식 중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지휘관은 엄중 문책받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부실 방역' 논란을 덮으려다가 A씨 성추행 사건마저 은폐하려 했던 것이 파국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다.
국방부는 이날 A씨 사건 조사와 관련, 민간 법률인 조언을 받겠다고 했지만 “사건을 군에만 맡겨선 안 된다. 민간 조사단에 맡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치권에선 이날 “공군참모총장뿐 아니라 국방부 장관까지 직을 걸고 책임져야 할 사안”이라고 했다. 군 안팎에선 이성용 공군 총장 등이 자진 사퇴하면서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