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王毅) 중국 외교부장 겸 외교 담당 국무위원이 9일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의 통화에서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을 정면 비판하며 “(미국의) 편향된 장단(偏節奏)에 휩쓸려선 안 된다”고 하는 등 한국의 처신 문제를 거론했다. 한국이 미국의 중국 견제 노선에 동참한 것으로 평가되는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 결과에 대해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 것으로 풀이된다. 왕이의 발언은 영국 G7(주요 7국)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출국을 이틀 앞두고 나왔다는 점에서 ‘미국이 G7 회의에서 주도하게 될 반중(反中) 성토 분위기에 휩쓸리지 말라’는 취지의 경고로도 해석된다. 이 같은 왕이의 발언은 한국 외교부 발표에서 통째로 누락됐다.
10일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왕이는 전날 통화에서 정 장관에게 “미국이 추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은 냉전적 사고에 가득 차 집단적 대결을 선동하고 지역 평화·안정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아 중국은 강력 반대한다(堅決反對)”고 했다. 이어 “우호적 이웃이자 전략적 파트너인 중·한은 옳고그름(是非曲直)을 파악해 올바른 입장을 견지하며 정치적 공감대를 지키고 편향된 장단에 딸려가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번 통화는 지난달 21일 한·미 정상회담 이후 처음으로 이뤄진 한·중 간 고위급 소통이었다. 당시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는 대만해협·남중국해 등 중국이 민감해하는 사안들이 대거 포함돼 ‘한국이 미국의 중국 견제 구상에 동참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고, 실제 중국 외교부도 “불장난하지 말라”며 반발한 상태다.
이를 두고 청와대와 외교부는 “반발의 수위가 낮다. 중국도 우리 입장을 이해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왕이의 반응은 한·미 정상회담 결과에 대한 중국의 반발 수위가 한국 정부의 예상을 크게 뛰어넘는다는 것을 시사한다.
왕이는 “중국과 한국은 제때(及時)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는 말도 했다. 중국 입장에선 뒤통수를 친 한·미 정상회담에 대한 설명이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았다는 불만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왕이의 발언은 미국 주도의 반중 연합체인 쿼드에 발을 담그지 말라는 경고로도 해석된다. 왕이가 언급한 ‘인도태평양 전략’ ‘냉전적 사고’ ‘집단적 대결 선동’ 등은 쿼드를 겨냥한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 장관은 왕이의 언급에 대해 “한국은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 발전을 고도로 중시하고 ‘하나의 중국’ 원칙을 견지하며 양안(중국·대만) 관계의 민감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중국 외교부는 전했다. 한국이 미국의 중국 견제 노선에 동참하는 것은 아니라고 적극 해명한 모양새다. 한국 외교부 발표엔 없는 내용이다. 특히 정 장관이 ‘하나의 중국’ ‘양안 관계’를 언급한 것을 보면 왕 부장이 한·미 정상 공동성명에 ‘대만해협’이 거론된 점을 크게 문제 삼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 외교부 발표엔 정 장관이 “미·중 관계가 안정적으로 발전해 나갔으면 한다”고 말했다는 내용만 소개돼 있다. 전직 고위 외교관은 “미국과 제발 싸우지 말아달라는 얘기”라며 “격화하는 미·중 갈등 국면에서 중심을 못 잡고 이리저리 휘둘리는 문재인 정부의 처지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왕이의 발언은 G7 정상회의 개막(11일)을 코앞에 두고 나왔다. 한국은 G7 회원국은 아니지만 주최국 영국의 초청을 받았다. 정 장관은 문재인 대통령을 수행해 11일 출국한다. 외교 소식통은 “중국 입장에선 반중 메시지가 분출하게 될 G7 정상회의에 한국이 참여하는 게 달가울 리 없다”며 “왕이의 발언은 영국에 가서 처신을 잘하라는 일종의 군기잡기로 볼 여지가 있다. 한국을 속국 취급하고 있다”고 했다.
또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정 장관은 남북 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피력하며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서 건설적 역할을 계속해 달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왕이는 “중국은 남북 관계 개선과 한반도 정세 완화 노력을 지지한다”며 “유엔 안보리에 민생 분야의 대북 제재 완화를 호소하고, 미측에 미·북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구체적 실천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왕이의 발언은 한국 외교부 발표에서 누락됐다.
대신 한국 외교부는 “양 장관은 고위급 교류가 한중 관계 심화·발전에 중요하다는 인식 아래 코로나19 상황이 안정돼 여건이 갖춰지는 대로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조기 방한을 위해 계속 소통해 나가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중국 외교부 발표엔 없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