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이듬해 6·25 전쟁이 터졌다. 소대장으로 참전(參戰)해 1950년 6월부터 전장을 누비는 틈틈이 주머니 속 작은 포켓 수첩에 ‘진중일기’를 빼곡히 적었다. 전쟁 4년 차였던 1953년에는 대대장으로 전장을 누비다 정전(停戰)을 맞았다.
올해 95세가 된 노병(老兵)은 ‘참전 수기를 내시라’는 주위의 권유를 70년 가까이 물리치다, 지난해에야 마침내 수기집을 냈다. 고령에도 주위 도움 없이 혼자 컴퓨터 한글 자판 두드리며 300페이지 가까운 책을 써내려 갔다. 수기집 제목은 ’95세 노병의 6·25 참전기'.
6·25전쟁 71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충남 천안시 자택에서 만난 이동식(95) 예비역 대령은 “별의별 것을 다 기념하고 행사를 하면서 정작 승전(勝戰) 기록이나 호국 영령을 기리는 기념비는 하나도 없는 경우가 많다”며 “젊은 세대에게 전쟁의 참상을 제대로 알려 교훈을 주고, 나와 전선을 누비다 희생당한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더는 늦출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의 수첩엔 전쟁이 시작된 1950년 6월부터, 중공군이 쏜 탄환에 중상(重傷)을 입기 전인 1951년 4월까지 10개월간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겼다. 매일 전투를 마치고 오면 당일 전투 내용과 특징을 기록했다. 이 전 대령은 “사실 그대로를 전부 남기고 싶어 주머니에 들어가는 작은 수첩에 잠을 줄여가며 쓴 것”이라고 했다.
진중일기엔 소대장 시절, 황해도에서 원인 모를 병에 걸려 황소를 타고 신계 전투 지휘를 했던 일화도 담겼다. 그는 “총성에 놀라 흥분한 황소 고삐를 잔뜩 움켜쥐고 옆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지휘를 했다”고 했다. 1950년 9월 영천 전투에서 승리한 뒤 대대 작전장교에게 자리를 양보했는데 불과 2~3초 뒤 적군 탄환이 날아와 작전장교가 즉사한 일화도 담겼다. 그는 “죽을 자리를 내준 것 같았다”는 비통한 심경을 남겼다.
그는 지금도 북한산을 보면 죄책감이 든다고 했다. 70년 전인 1951년 3월 20일의 전투가 아직 생생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당시 중대장이었던 그는 1·4후퇴 이후 반격에 나서 북한산 716고지를 인민군으로부터 탈환했다. 하지만 고지대에 있던 적(敵)과 맞서 싸우다 12명의 전우를 잃었다. 그는 “북한산을 올려다보면 그곳에서 희생된 전우들이 생각나 죄책감이 든다”며 “전쟁 때 얻은 총상 흉터는 이제 옅어져 보이지 않게 됐지만 당시 기억만큼은 또렷하다”고 했다.
육사 8기로 임관한 그는 6·25전쟁에서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을 역임하며 전투를 지휘했다. 문산, 북한산, 파주 전투 등에 참전했고 정전 후에는 보병 제17연대장, 육군대학 교수단장, 국방부 총무과장 등을 지내다 1969년 대령으로 자원 예편했다. 이 전 대령의 셋째 아들도 그를 따라 장교의 길을 걸었다. 아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서울대 치대와 육군사관학교 소집일이 겹쳤는데, 그는 서울대 진학을 희망하는 아들을 ‘차로 태워다주겠다’고 하면서 슬쩍 육사 정문 앞에 내려줬다고 한다. 결국 아들은 육사에 진학했고, 준장으로 예편했다. 아들인 이의성 예비역 준장은 “어릴 때부터 밥상머리에서 아버지의 6·25전쟁 당시 경험담을 들으며 자랐다”며 “아버지는 멋있고 자랑스러운 내 롤모델이셨다”고 했다.
95세의 노병은 “안보를 늘 제1의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북한 퍼주기'에 정신 없는 우리나라를 보며 국격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우리 전우들이 어떻게 지킨 나라인데. 경제가 중요해도 안보가 늘 우선이 돼야 합니다. 후손들에게 해주고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