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부부장이 8월 한미 연합훈련에 대해 “북남 관계의 앞길을 흐리게 한다”고 경고를 날리자 정부·여당 안에서 또 훈련 연기를 언급하는 등 이견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기존 여야 갈등에 정부·여당 내부 혼선까지 겹치며 남남(南南) 갈등 양상이 복잡해지고 있다. 안보 차원에서 다뤄져야 할 연합훈련 문제가 2018년 남·북·미 ‘비핵화 쇼’ 이후 정치 논리에 휘둘리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한미는 오는 10~13일 훈련 예행 연습을 거쳐 16~26일 본 훈련을 실시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상태다. 야외 실기동 없이 컴퓨터 시뮬레이션 방식으로 축소 실시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김여정 담화 하루 만인 2일 더불어민주당 설훈 의원은 “훈련을 연기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 남북 통신선 복원 등을 언급하며 “교류 협력 재개에 시동이 걸렸다” “현 국면을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가 “훈련은 예정대로 진행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히자 설 의원은 다시 “연기는 우리가 득을 보는 선택인데 집권 여당 대표가 선을 그은 것은 유감”이라고 했다. 한미 연합훈련을 두고 여당 내에서 입장이 갈린 것이다. 설 의원은 민주당 대선 경선에 출마한 이낙연 전 대표 선대위원장을 맡고 있다.
정부 내에서도 혼선이 감지됐다. 통일부에서는 지난주 고위 당국자가 “(훈련을) 연기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운을 띄운 데 이어 이날 이종주 대변인이 “한미 연합훈련이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조성하는 계기가 돼선 안 된다”고 했다. 한반도 군사적 긴장의 근본 원인인 북핵 위협에 대한 지적은 없었다. 국방부는 이날 “훈련 실시 여부는 한미 당국에 의해 결정될 사안”이라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히면서도 내부적으로는 김여정 담화를 의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 의견이 훈련 연기 쪽으로 수렴되면 국방부도 이를 무시하기 어렵다.
청와대는 이날 훈련과 관련,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한미 양국이 협의 중”이라며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실질적 진전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군 안팎에선 “현 정권 성향상 남북 관계를 위해 훈련을 희생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번 훈련이 연기·취소될 경우 이는 김여정이 대한민국의 주권에 영향을 미치는 최소 5번째 사례가 된다. 앞서 김여정이 작년 6월 대북 전단 살포를 비난하며 우리 정부에 “(금지)법이라도 만들라”고 요구하자 통일부는 4시간여 만에 곧장 “준비 중”이라고 했고 민주당은 전단금지법을 단독 처리했다. 올해 5월 김여정이 재차 탈북민들의 삐라 살포에 대해 “남조선 당국이 방치하고 있다”고 했을 때는 바로 경찰청이 “청장이 전단 살포에 대해 철저한 수사를 통해 엄정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김여정 담화에 한국 정부 장관들도 줄줄이 교체됐다.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은 김여정의 작년 6월 담화 2주 뒤 “남북 관계 악화의 책임을 지겠다”며 떠밀리듯 사의를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할 것으로 관측됐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김여정 데스노트’에 이름이 오른 지 한 달 만에 교체됐다.
북이 통신선 복원을 ‘대남 시혜’로 간주하는 것이 김여정 입을 통해 확인된 만큼, 연합훈련 연기 요구는 시작이고 앞으로 제2, 제3의 청구서를 보내올 것으로 예상된다.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연합훈련뿐 아니라 우리 군의 단독 훈련, F-35를 비롯해 예산에 반영돼 순차 도입될 무기 체계에 대해 트집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