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5일 동해상으로 한국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사거리 800㎞의 탄도미사일 2발을 발사했다. 영변 원자로의 재가동 징후 노출(7월), 장거리 순항미사일 발사(9월 11~12일) 후 이뤄진 것으로 도발의 수위는 높아지고 주기는 짧아지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왕이 중국 외교부장을 접견한 직후에 이뤄졌다. 북한이 최대 우방인 중국 외교 사령탑이 서울에 체류하던 시점에 대남 타격용 무기로 무력시위를 벌인 것은 이례적이다. 북 발사 약 1시간 후에는 문 대통령이 우리가 독자 개발한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시험 발사를 참관했다. 그러자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이날 오후 늦게 담화를 내고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 미사일은 북한 도발을 억지하기에 충분하다’는 부적절한 실언을 했다”며 “한 개 국가의 대통령으로서 우몽하기 짝이 없다. 언동에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통령까지 나서 상대방을 헐뜯는 데 가세한다면 북남 관계는 완전 파괴로 치닫게 될 것”이라고 했다. 북이 문 대통령 실명을 거론하며 비난한 것은 처음이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 결의 위반에 해당한다. 지난 주말 발사한 순항미사일에 대해 우리 정부가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지 않았다”고 하고 미국도 별다른 규탄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도발의 강도를 높인 것으로 해석된다.
합동참모본부에 따르면 북한은 이날 낮 12시 34분, 12시 39분쯤 평안남도 양덕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단거리 탄도미사일 2발을 발사했다. 북한이 안보리 결의 위반인 탄도미사일 발사에 나선 것은 지난 3월 25일 이후 6개월 만이다. 합참은 북한이 이날 발사한 탄도미사일의 사거리를 800㎞, 고도를 60㎞로 탐지했다고 밝혔다. 지난 3월 발사한 북한판 이스칸데르 KN-23 개량형으로 추정된다. 6개월 만에 사거리가 200㎞가량 늘었다.
문 대통령은 서훈 국가안보실장에게 곧바로 보고를 받았다고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밝혔다. 이후 서훈 실장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가 소집됐다. 청와대는 “NSC 상임위원들은 정세 안정이 매우 긴요한 시기에 이루어진 북한의 연속된 미사일 발사 도발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고 밝혔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는 올 들어 다섯 번째 무력 도발이다. 북한은 미 바이든 대통령 취임식 다음 날(1월 22일) 순항미사일을 발사했고, 지난 3월 말 전반기 한미 연합 훈련 종료 직후 순항·탄도미사일을 연달아 쐈다. 8월 한미 연합 훈련이 끝나자 순항·탄도미사일을 연달아 쏘는 3월의 패턴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는 “일본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로 언어도단이자,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이라고 했다.
특히 이번 도발은 영변 핵 시설의 재가동 징후와 맞물려 주목된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지난 7월 초부터 영변 5㎿ 원자로의 재가동 정황을 포착한 데 이어, 8월 말~9월 초엔 가동 중지 상태였던 우라늄 농축 시설에서 이상 징후를 감지했다고 밝혔다. 영변 핵 단지를 풀가동하면 핵폭탄 원료인 플루토늄과 고농축우라늄(HEU)을 모두 얻을 수 있다.
전직 고위 외교관은 “북이 보란 듯이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에 박차를 가한다는 것은 식어버린 미국의 관심을 끌어 대북 정책의 전환을 압박하겠다는 의도”라고 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 후 국내 정치 상황과 이란 핵합의 복원, 아프가니스탄 철군 문제 등으로 북한에 눈을 돌릴 여지가 많지 않다. 이 같은 점을 고려해 북한이 최근 미국 등 국제사회의 반응을 떠보려는 일련의 도발에 나선 것으로 해석된다.
북한은 지난 7월 초 영변 원자로 재가동 징후에 미국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한 달 뒤엔 우라늄 농축 공장에서 ‘냄새’를 피웠다. IAEA가 지난달 말 영변 상황을 공개했는데도 미국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최종건 외교부 1차관도 지난 7일 “남북 합의 위반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북한은 다시 미사일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지난 11~12일 장거리 순항미사일을 두 차례 발사하고 13일에 이를 스스로 공개한 데 이어 15일에 안보리 제재 위반에 해당하는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안보 부서 관계자는 “살라미식으로 도발의 단계를 잘게 썰어가며 미국의 반응을 보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며 “미국이 안보리 소집 등 어떤 대응에 나서는지 지켜본 뒤 추가 도발 여부와 수위를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외교가에선 북한의 탄도미사일 연속 발사가 대북 제재 완화를 주장해온 중국의 왕이 외교부장이 문재인 대통령을 예방한 직후 이뤄진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베이징의 외교 소식통은 “북한은 중국이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 정도는 눈감아 줄 것으로 확신하는 듯하다”며 “이보다 도발 수위를 높일 경우 국제사회에서 북한을 두둔해온 중국의 체면을 구길 수도 있다”고 했다. 정의용 장관과의 오찬에서 북한의 도발 소식을 접한 왕 부장은 “(북의 도발이) 남북 관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도 관련국들의 자제를 강조했다고 외교부는 전했다.
북한의 잇단 도발이 미국을 의식한 무력시위라기보다는 사전에 설정한 ‘핵 무력 증강 계획’을 이행하는 성격이 짙다는 해석도 나온다. 예비역 장성 A씨는 “북한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김정은이 지난 1월 당대회에서 지시한 ‘첨단 핵 전술 무기 개발’을 이행하는 것”이라며 “미국의 관심을 끌어 대미 협상력을 높이는 것은 부수적인 소득”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