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21일(미국 현지 시각) 미국 뉴욕에 동시에 체류했지만 정상회담은 물론이고 만남도 갖지 않았다. 두 정상 모두 유엔 총회에서 연설을 했고 머문 숙소도 멀지 않았다. 하지만 공식적인 만남은 물론이고 가볍게 인사하는 회동조차 없었다. 외교가에선 바이든 대통령이 일부러 문 대통령과 만남을 피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7일 오후 청와대 여민관 영상회의실에서 화상으로 열린 '에너지 및 기후에 관한 주요 경제국 포럼(Major Economies Forum on Energy and Climate, MEF)'에 참석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개회사를 듣고 있다./뉴시스

미국 정부는 코로나 확산 방지를 이유로 각국 정상의 유엔 총회 참석을 권유하지 않았다. 문 대통령 또한 초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방미를 밀어붙였고 유엔 총회에서 직접 연설했다. 문 대통령이 유엔에 간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종전선언을 공식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유엔 총회 연설에서 “남·북·미·중 또는 남·북·미가 한반도에서 전쟁이 종료됐음을 선언하자고 제안한다”고 말했다. 최근 북한이 영변 핵시설을 재가동하고 미국과 한국을 겨냥한 탄도·순항 미사일을 잇따라 발사하고 있는 상황과 배치되는 얘기였다. 미국은 문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거론하는 것에 대해 탐탁치 않아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이 종전 선언 연설을 강행하자 미 조야에선 부정적 기류가 커졌다.

당초 우리 정부는 방미를 준비하면서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도 내심 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문 대통령의 방미를 별로 반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북한이 잇따라 핵 개발과 미사일 도발을 재개하는 상황에서 종전 선언은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이 종전 선언을 제안하자 미국 정부는 상당한 실망감을 느낀 것으로 전해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문 대통령과 같은 날인 지난 21일 유엔 총회에서 기조 연설을 했다. 같은 날 비슷한 시각에 두 정상이 뉴욕에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바이든 대통령은 문 대통령과 잠깐의 만남이나 조우도 하지 않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뉴욕에선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와 만나 회담했다. 또 워싱턴 DC의 백악관으로 돌아가선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를 만났다. 이 때문에 외교가에선 바이든 대통령이 문 대통령과 만남을 의도적으로 피한 것 같다는 관측이 나온다.

문 대통령과 만나면 종전 선언과 대북 유화 정책에 대한 얘기가 나올 가능성이 큰 데 이를 꺼렸다는 것이다. 한미 정상이 한 날 한 시에 가까운 장소에 있었는데 인사조차 못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조선일보 팟캐스트 ‘강인선 배성규의 모닝라이브’에 출연, “과거 한미 외교 관례에 비춰볼 때 이건 거의 외교 참사에 가깝다”며 “이 정도로 가까운 장소에 있을 때 두 정상이 만나지 않은 것은 전례가 드물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의 무리한 종전 선언 추진 때문에 지난 6월 복원 기미를 보였던 한미 관계가 다시 한번 갈등 국면으로 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은 지금 종전 선언을 할 때가 아니라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에 대해 제재를 강화해야 할 때라고 여기고 있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27일 한미 안보 협의에서도 미국 측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로 국제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정부가 “북도 종전 선언을 좋은 발상이라고 하니 동맹인 미국이 협조해 달라”고 한 것과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 것이다. 한미가 종전 선언을 두고 상당한 입장차를 보였다는 해석이다.

북한은 당초 문 대통령의 종전 선언 제안에 대해 “종이장에 불과하다”며 걷어차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김여정이 다음날 곧바로 “흥미롭다”고 하더니 하루 후엔 “좋은 발상”이라고 입장을 바꿨다. 신 센터장은 “처음엔 쓸모없는 제안이라고 여겼던 북한이 종전 선언을 역이용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라며 “종전 선언 이슈로 한국의 양보를 이끌어내고 한미관계도 이간시키려는 의도”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이간계 시도는 어느 정도 먹혀들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한미 당국이 이 문제로 상당한 이견을 노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종전 선언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해 보려는 정부의 욕심이 북한에 역이용 당해 한미 갈등만 키울 수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