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로명(89) 전 외무장관의 구순(九旬)을 앞두고 후배 외교관과 지인 등 52명이 글을 모아 문집 ‘공로명과 나’를 6일 펴냈다. 1958년 외무부에 들어가 38년간 초대 주소련 대사, 주일 대사, 외무장관 등 요직을 거치며 대한민국 외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공 전 장관에 관한 비화가 다수 담겼다.
많은 후배와 지인이 공 전 장관의 외교안보연구원장 시절(1992~1993년)을 회고했다. 당시 외교안보연구원장은 ‘남북 핵통제공동위원회’의 남측 대표를 맡아 북한과 핵 협상을 벌였다. 북측 단장이었던 최우진 외교부 부부장은 회담 때마다 ‘6·25는 북침’이란 궤변을 늘어놓았는데, 공 전 장관의 재치 있는 대응이 두고두고 회자됐다.
당시 외교안보연구원 조교수로 협상에 참여했던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공 전 장관이 “6·25를 김일성과 스탈린이 모의해서 일으킨 증거가 있다”며 최우진에게 사진 한 장을 건넨 일화를 소개했다. 사진을 받자마자 박박 찢는 최우진에게 공 전 장관은 “아이고, 수령님 얼굴을 막 찢어도 되느냐”고 했고, 사색이 된 최우진은 김일성 사진을 온전하게 도려내느라 쩔쩔맸다.
북측 지역인 통일각에서 회담할 때도 공 전 장관은 위축되지 않았다고 한다. 공 전 장관의 보좌관 출신인 김숙 전 유엔 대사에 따르면, 공 전 장관은 ‘6·25는 북침’을 주장하는 최우진에게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고 면박을 줬다. 화가 난 최우진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장광설을 늘어놓자 공 전 장관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먹으라고 했다. “이게 뭐냐”고 묻는 최우진에게 공 전 장관은 “남쪽에서 만든 우황청심환인데 쓸데없이 열 오르는 데 효과가 있다”고 했다. 최우진은 “일 없시요” 하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우진이 회담 주제와 무관한 ‘6·25 북침’ 궤변을 되풀이한 것은 회담을 원격 조종하는 평양 수뇌부를 의식했기 때문이다. 최우진이 자신의 안위만 신경쓰는 상황에서 협상은 진척되기 어려웠다. 당시 핵통제위 부위원장으로 공 전 장관을 보좌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참다 못한 공로명 장관은 ‘평양 쪽을 바라보지 말고 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라’며 북측 대표단을 다그쳤다”고 회고했다.
신각수 전 외교부 1차관은 “공 장관이 우리 국민뿐 아니라 외교부 후배들에게 존경하는 선배로 각인된 가장 큰 계기는 1983년 중국 민항기 납치사건”이라고 했다. 선양에서 상하이로 가던 중국 민항기가 대만인에게 납치돼 춘천에 불시착한 것이다. 6·25 전쟁 이후 국교 없이 적대해온 한·중 관계에 날벼락이었다. 선투(沈圖) 민항국장을 수석대표로 하는 33명의 대표단을 파견한 중국은 항공기와 승객·승무원 100여명에 납치범까지 인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한국측 회담대표로 나선 공로명 당시 차관보는 “남의 집 안방에 구두 신고 들어와서는 주인한테 인사도 안 하겠다는 이야기냐”며 중국을 강하게 압박했다. 동북아1과장으로 실무를 맡은 김석우 전 통일원 차관은 “공로명 차관보는 과연 원숙한 외교관이었다”며 “상대방의 요구를 경청하면서도 국제법과 국제규범에 따라 한국의 입장을 관철하는 노련함과 침착함을 보여줬다”고 했다. 그 결과 승객과 승무원, 항공기는 중국에 돌려보내고 납치범들에 대해선 한국이 재판관할권을 행사하는 절충안을 도출했다. 원만히 해결된 이 사건은 훗날 한중 수교의 밑거름이 됐다.
후배 외교관들은 공로명 장관 시절의 한미관계가 역대 최상이었다고 평가했다. 1994년 12월 외무부 수장에 오른 공 전 장관은 북핵 협상팀을 새로 짰다. 미·북 제네바합의 이행 문제로 한미 간의 접촉이 빈번했던 때다. 당시 외무부 차관보로 한미 고위급협의회를 이끈 이재춘 전 주러시아 대사는 “새로운 공 장관팀은 ‘벼랑끝 전술에는 역(逆)벼랑끝 전술로’라는 기치 아래 미국과의 협의에 임했다”며 “윈스턴 로드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운전대는 한국이 잡고 미국은 조수석에 앉겠다’고 했고, 그때부터 ‘같이 갑시다’란 구호가 생겼다”고 했다.
외교부 차관을 지낸 조태용 국민의힘 의원은 “공 장관이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줄곧 주미대사관에서 근무한 나는 미국 외교관들이 공 장관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것을 들으면서 어깨가 으쓱했던 기억이 있다”며 “공 장관 사임(1996년) 후 한동안 한미 공조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공 전 장관은 한미동맹의 강력한 신봉자였지만 국익을 위해 미국에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북한에 한국형 경수로를 제공하는 문제로 한미 간에 갈등이 한창이던 1995년 6월 당시 갈루치 대사와 로드 차관보가 방한했다. 미측이 여전히 한국보다 북한 입장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공 전 장관은 “미국이 어떻게 동맹국의 팔을 비트느냐(arm twisting)” “미국이 한국을 함부로 다룬다(manhandle)”며 언성을 높였다고 임성준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당시 미주국장), 김숙 전 유엔대사(당시 장관보좌관) 등은 회고했다.
공 전 장관은 북한의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1995년 9월 유엔 총회 연설을 통해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 북한 주민이 보편적 인권을 향유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유엔과장이었던 오준 전 유엔대사는 “2003년 북한인권 문제가 유엔 의제로 상정되기 전에 국제적 논의의 효시가 됐다”고 했다. 오 전 대사는 2014년 12월 안보리 이사국 자격으로 북한인권 문제를 안보리에 최초로 상정했다. 오 전 대사는 “그때 북한 인권에 관한 연설을 하면서 19년 전 공 장관의 연설이 떠올라 마음이 벅찼다”고 했다.
공 전 장관은 2002년 한일 월드컵과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등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인 대형 스포츠 행사 유치의 숨은 공신이기도 하다. 1996년 2월 공 전 장관의 보좌관으로 발탁된 이용준 전 이탈리아 대사는 “공 장관은 외교부 조직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일본과의 월드컵 공동유치를 성사시키기 위해 각국의 FIFA(국제축구연맹) 위원들에 대한 교섭을 직접 재외공관장들에게 지시하는 등 고군분투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공 장관이 희망을 걸었던 것은 일본이 마지막 순간에 한일 공동개최에 동의할 가능성이었다”며 “장관의 판단은 옳았다. 일본은 표 대결을 강행하지 못하고 1996년 6월1일 한일 공동개최를 수락했다”고 했다.
공 전 장관이 믿는 구석도 없이 공동개최 시나리오에 베팅한 건 아니다. 이와 관련,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일본 외무상은 1994년 10월 한승주 외무장관과의 회담에서 자신이 월드컵 공동 주최안을 극비 제안했고, 그 자리에 공로명 당시 주일대사가 배석했다는 사실을 이번 문집을 통해 공개했다. 고노 전 외무상은 “한승주 장관은 돌발적인 제안에 상당히 놀란 모습이었고 동석한 공로명 대사에게 설명을 구했다. 공 대사는 ‘고노 대신의 제안은 하나의 방안’이라 말했고, 한 장관도 ‘검토해 보자’고 말했다”며 “공 선생은 2002 한일 공동개최 월드컵을 탄생시킨 주인공 중 한 명”이라고 했다.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장으로 공 전 장관을 영입한 김진선 전 강원지사는 “공 위원장은 탁월한 리더십과 두터운 인적 네트워크, 노련한 외교력과 유창한 영어 구사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며 “공로명 위원장이 분야별로 수많은 인사를 이끌면서 함께 쌓아놓은 토대가 없었다면 평창동계올림픽이 과연 가능했겠는가”라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외교 멘토인 문정인 세종연구소 이사장도 공 전 장관과의 30년 인연을 소개했다. 미국 켄터키대학 교수 시절(1992년) 외교안보연구원장이었던 공 전 장관을 처음 만났다는 문 이사장은 “(우리 두사람 사이에) 의견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북한과 주변 4강을 보는 시각은 다르다”면서도 “(공 전 장관이) 처지가 다르다고 싫은 내색을 하거나 역정 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토론이 격해지면 절충안을 내고 상황을 반전시키는 탁월한 재주가 있다. 여기서 진정한 외교관의 표상을 보게 된다”고 했다.
문집에는 공 전 장관과 교류했던 일본 인사들의 글도 9편 실렸다. 스기야마 신스케(杉山晋輔) 전 외무성 사무차관은 “주일대사로 활약하던 공 선생이 사이토 구니히코(斎藤邦彦) 당시 외무차관과 만날 때 나는 젊은 비서관으로 사이토 차관을 모셨다”며 “사이토 차관이 공로명 대사만큼 훌륭한 외교관, 아니 훌륭한 지식인은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게 아니니 잘 봐 두라고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하코다 데쓰야(箱田哲也) 아사히신문 논설위원은 “공로명 장관의 기사를 검색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며 “(공 전 장관이) 주일대사 시절 일본 총리를 자주 만났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일본 신문은 전날 총리가 몇시에 누구와 얼마나 길게 만났는지 상세하게 보도한다. 그러한 총리 동정에 공 장관은 몇번이나 등장한다”며 “올 1월에 부임한 강창일 대사가 지금까지 총리는커녕 외무상과도 만나지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구로다 가쓰히로(黒田勝弘) 산케이신문 객원논설위원은 일본 정부가 사상 처음으로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 8월)와 관련, “담화를 발표하기 약 한 달 전 공로명 주일대사는 도쿄의 일본기자클럽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으로 일본 정부가 강제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며 “고노 담화는 공로명 대사를 비롯해 한일 양국의 외교적 노력에 의해 외교적으로 내린 결론이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