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는 28일 러시아에 대한 전략 물자 수출을 차단하고, 러시아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망에서 배제하는 데 동참한다고 밝혔다. 외교부는 이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무력 침공을 규탄한다”며 이같이 발표했다. 미국의 동맹·우방 가운데 유일하게 대러 제재 방안을 확정하지 못하고 머뭇대다 국내외 비판이 거세지자 늑장 발표한 모양새다.
문재인 정부는 러시아의 침공 외에도 중국의 신장·위구르 인권 탄압, 북한의 무력시위 등 권위주의 정권들의 잘못된 행동을 제재하기 위해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 민주 진영이 연대할 때마다 소극적 태도로 일관해 논란이 되고 있다. 외교가에선 “미국의 1류 동맹이던 한국이 불량 국가들 눈치를 보느라 2류, 3류 동맹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 정부의 미온적 대응은 우크라이나 사태 초기부터 도마에 올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에 군대를 최초 투입한 지난 22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이를 ‘침공’으로 규정하고 동맹·우방들과 연대해 제재의 포문을 열었지만 한국 정부는 “검토 중”이라고만 했다. 이틀 뒤 러시아의 전면 침공으로 사태가 급박해지고 나서야 ‘제재 동참’ 의사를 밝혔다. 미국, 유럽연합(EU), 영국, 일본, 캐나다, 호주 등 32국은 이미 독자적 대러 제재안을 확정해 속속 발표하고 있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한국 정부는 기업들에 미칠 파장을 분석해야 한다는 이유로 제재안 확정을 차일피일 미뤘고, 결국 미국 상무부의 대러 수출 통제 조치에서 미국의 동맹·우방 가운데 유일하게 ‘역외 통제(FDPR·해외직접제품규칙) 규정’ 면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상황을 자초했다.
이날 외교부의 대러 제재 발표는 문재인 대통령이 참모 회의에서 “제재에 동참하면서 제재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대응 방안을 확실하게 마련하라”고 지시한 직후 이뤄졌다. 이마저도 미국의 제재를 극히 일부만 따라가는 것이라 FDPR 면제 혜택을 받기 어려울 전망이다.
미국은 한국의 미온적 태도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전직 관리들은 “소심하다” “부끄럽다”는 직설적 표현으로 한국에 불만을 쏟아내고 있다. 마크 피츠패트릭 전 국무부 부차관보는 자유 민주 진영의 원조로 전쟁의 참화를 극복한 한국의 역사를 거론하며 “수치스럽다”고도 했다.
심각한 것은 한국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당연히 내야 할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미국이 이에 실망하는 사례들이 쌓여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의 대중 견제·압박 전선 이탈이다. 작년 한 해 미국은 통상·외교·정보 분야 장차관급 인사들을 한국에 연쇄 파견해 글로벌 공급망 재편 등의 대중국 견제·압박 전선에 동참해줄 것을 강력 요청했지만 한국은 즉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지난해 전 세계 43국이 유엔에서 중국의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신장 위구르 인권 탄압을 비난하는 데 한국은 불참했다. 이 연장선에서 미국이 주도한 베이징 올림픽 외교 보이콧 역시 웬만한 미국의 동맹·우방은 동참했지만 한국은 국회의장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파견했다.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가 중국·러시아의 잘못된 행동을 제재하는 데 소극적인 것은 결국 북한 때문”이라고 했다. 임기 내내 북한과의 평화 이벤트 성사에 집착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우방인 중국·러시아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데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 것 아니냐는 것이다. 북한의 대한 문재인 정부 특유의 저자세 외교가 대중·대러 관계에서도 작동했다는 분석이다.
최근 워싱턴에서 가장 납득하기 어려웠던 장면은 한국 정부가 북한의 미사일 연쇄 도발을 규탄하는 미국 주도의 공동성명에 3차례 연속 불참한 것이다. 북한이 쏜 미사일은 대부분 사거리가 수백㎞의 신형 탄도미사일 또는 방사포로 모두 대남 타격용이란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가 안보리 결의 위반임을 지적하거나 규탄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한국은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 공동제안국에도 3년 연속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워싱턴의 외교 소식통은 “바이든 행정부에선 과연 한국이 진정한 친구가 맞느냐는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며 “북·중·러를 감싸는 한국의 태도는 한미가 공유하는 자유·민주·인권의 가치를 훼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해외직접생산품규칙
미국 밖에서 생산된 제품이라도 해당 제품을 생산하는 데 미국의 소프트웨어나 원천 기술이 포함됐다면, 이를 수출하는 데 있어 미국 상무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