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25일 항일 빨치산 결성 90주년 열병식 연설에서 대남·대미 선제 핵 공격 가능성을 시사하며 그 조건을 ‘어떤 세력이든 우리 국가의 근본 이익을 침탈하려 들 경우’라고 했다. 임박한 적대세력의 공격을 제압하거나 교전상황에서 전세를 뒤집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평시에 상대방의 비군사적 조치에도 핵을 사용할 수 있다고 협박한 것이다.
김정은이 언급한 ‘근본 이익’은 체제의 존립에 관한 모든 것을 망라하는 개념이다. 그동안 북한은 주한미군 주둔과 한미 연합훈련, 한국의 첨단 무기 도입을 물론 대북 제재와 완전한 비핵화 요구, 최고 존엄(김정은) 모욕 등을 근본 이익과 직결된 사안으로 치부하며 강한 거부감을 표출해왔다. 전직 통일부 관리는 “김정은의 발언은 북한 정권을 흔드는 모든 위협을 핵 사용의 명분으로 삼겠다는 경고”라며 “대남·대미용 핵 개발을 모두 완성했다는 자신감이 엿보인다”고 했다.
이 같은 김정은의 언급은 북한의 기존 핵개발 논리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과거 북한은 “조선의 핵은 평화 수호와 민족부흥의 절대적 상징”(2017년 6월 3일 자 노동신문), “우리 국가의 핵무력은 미국이 모험적인 불장난을 할 수 없게 제압하는 강력한 억제력”(2018년 1월 1일 김정은 신년사), “분명코 우리는 남조선을 겨냥해 국방력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다”(2021년 10월 12일 김정은 연설)라고 했다. 핵 개발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방어용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한국 내 친북·반미 세력을 겨냥해 ‘대미용’임을 부각했던 것이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을 지낸 유성옥 진단과대안연구원장은 “이번에 김정은은 핵무기를 방어용이 아닌 공격용으로 쓰겠다는 본색을 드러냈다”며 “미국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한 용도라던 기만을 벗어던지고 대남·대미 핵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을 과시했다”고 했다.
핵 사용 원칙에 대한 북한의 기류 변화는 지난 5일 김정은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 부부장이 ‘대남 핵 타격’을 언급하면서 감지되기 시작했다. 김여정은 당시 노동신문 담화에서 “남조선이 우리와 군사적 대결을 선택하는 상황이 온다면 부득이 우리의 핵 전투 무력은 자기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게 될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까지 간다면 무서운 공격이 가해질 것이며 남조선 군은 궤멸, 전멸에 가까운 참담한 운명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실제 북한은 김여정 발언 이후인 지난 16일 전술 핵 탑재가 가능한 신형 전술핵 탄도미사일 시험 발사에 나섰다. 김정은이 직접 발사 현장을 참관했다. 당시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신형 전술핵 미사일은) 전선 장거리 포병부대(최전방 장사정포 부대)들의 화력 타격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것”며 신형 전술핵 미사일의 최전방 배치를 예고했다.
국가정보원 1차장을 지낸 남주홍 경기대 석좌교수는 “김여정이 선제 핵 사용의 운을 뗐고 김정은이 열병식에서 이를 공식화했다”며 “한국의 차기 정부를 향해 핵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라고 했다. 전성훈 전 통일연구원장은 “이제 북한 비핵화라는 용어 자체가 무용지물이 됐다는 것을 선언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했다.
김정은은 이번 연설에서 “공화국의 핵 무력은 언제든지 자기의 책임적인 사명과 특유의 억제력을 가동할 수 있게 철저히 준비돼 있어야 한다”며 “우리 국가가 보유한 핵 무력을 최대한 급속한 속도로 더욱 강화·발전시키기 위한 조치들을 계속 취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이는 함경북도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준비 중인 7차 핵실험 등을 염두에 둔 언급으로 해석됐다. 군·정보 당국은 북한이 조만간 전술 핵무기용 핵실험을 강행할 것으로 보고 풍계리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