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1970년대 초 분단 이후 처음 대화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남북적십자 파견원 접촉 과정에서 팽팽한 기싸움을 벌인 사실이 최초로 공개됐다. 통일부는 4일 남북회담이 시작된 1970년대 초반 남북 회담 문서 일부(남북대화 사료집 제2・3권, 1970년 8월~1972년 8월, 총 1652쪽)를 일반 국민에게 처음으로 공개했다.
공개된 문서에는 분단 이후 남북 대화 첫 문을 연 남북 적십자 파견원 접촉부터 25차례에 걸친 남북 적십자 예비 회담까지 진행 과정이 포함됐다.
1971년 9월 3일 열린 남북적십자 ‘4차 파견원 접촉’ 당시 남측 파견원 이창열은 북측에 “우리는 언챙이를 1년에 3~4백명 치료한다”며 “72년이면 우리 남한에 언챙이(언청이)는 다 없어진다”고 자랑했다. 이에 북측 파견원 염종련은 “우린 언챙이 수술뿐만 아니라 앉은뱅이도 서게 합니다”라고 응수했다.
앞서 8월 30일 열린 3차 접촉 때 북측의 서성철이 ‘남북의 래왕이 실현될 경우 남측 대표들을 초청하겠다. 우리도 가면 반가이 맞아주겠냐’고 묻자 남측 이창열은 ‘서울에 31층짜리 빌딩 스카이 라운지에 초대하겠다’고 답했다. 그러자 서씨는 “저는 선생님(이창열)댁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북측 서성철이 ‘명칭’문제와 관련해 “우리 정식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적십자회”라며 남측이 정식명칭을 사용할 것을 요구하자 남측 이창열은 “명칭 문제는 차원이 높은층에서 결정하실 문제지 우리야 ‘배달부’아닙니까”라며 받아 넘겼다.
그해 9월 16일 5차 파견원 접촉에선 교육제도를 두고 남북 간 치열한 기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북측 서씨가 “아들, 딸이 모두 합해 셋인데 우리나라의 교육제도·사회제도가 좋으니까 좋은 조건에서 공부하고 있다”고 말하자 남측의 이씨가 “나는 딸이 셋 있는데 장학금을 받아서 유학시키고 있다”고 했다. 이에 북측 서씨가 “우리는 학교에서 돈 받는 것 없는데 거기는 공납금이 높아진다고 말이 많더라”고 남한의 교육제도를 비난했다. 남측 윤씨가 “그만큼 개인의 능력도 높아지고 있어요. 선생님은 모든 일을 국가에서 지원한다고 하시는데 개인의 능력을 그렇게 무력화시켜서 되겠어요?”라고 응대했다. 이에 열 받은 북측 서씨가 “소 웃다가 꾸레미가 터진다는 말이 있어요”라고 비꼬자 남측 이씨가 “소가 웃는 것 일평생 못봤다”고 면박을 주기도 했다.
분단 26년 만에 이뤄진 남북 당국 간 만남은 1971년 8월 20일 이뤄졌다. 남북적십자 파견원들은 첫 접촉에서 간단한 인사와 신임장만 주고 받고 헤어졌다. 남측에선 이창열·윤여훈, 북측에선 서성철·염종련이 각각 적십자사 파견원으로 나왔다. 일주일 후인 71년 8월 26일 파견원 2차 접촉에선 구면이라 신임장 교환을 생략하고 바로 문서교환에 들어갔다.
이산가족 상봉에 소극적인 북한이 당시에는 오히려 한국보다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정황도 드러났다. 1971년 11월3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예비 회담 당시 북한은 시종일관 조속한 이산가족 상봉을 촉구했다. 북한은 또 이산가족의 자유로운 남북한 왕래와 서신 교환을 요구했다. 이는 현재 이산가족 상봉 요구에 일절 응하지 않고 있는 북한의 태도와는 대조적이다. 통일부 당국자는 “70년대 초는 북한이 한국보다 체제경쟁에서 유리하다고 여기던 시절로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라고 했다.
예비 회담은 1972년 6월에야 성과를 냈다. 예비 회담 19회와 의제 문안 실무 회의 13회를 거쳐 남북 적십자 본회담에서 논의할 의제 5개항이 채택됐다. 5개항은 이산가족 주소와 생사 확인, 자유로운 방문과 상봉, 자유로운 서신 교환, 자유 의사에 의한 재결합, 기타 인도적 문제 해결 등이다. 5개항은 현재도 이산가족 상봉의 기본틀로 적용된다.
본 회담은 1972년 8월부터 열렸다. 본 회담은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가며 7회에 걸쳐 열렸지만 북한이 한국의 법률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등 정치적 문제를 거론하면서 또다시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던 북한은 1973년 8월28일 본 회담마저 중단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