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호국영웅 초청 소통식탁’ 행사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는 윤청자 여사./ 사진=뉴시스

팔순 노모의 기억은 그랬다. 엊그제 일은 희미해도, 수십 년 전 일은 선명했다.

“세상에, 요(손바닥)만 한 애가 태어났어요. 어찌 작은지, 창새기(창자)가 다 보일 정도였어요. 옛날 가난한 집에 우유가 있어, 뭐가 있어. 영양실조에 걸려서 젖도 안 나오지, 밥 넣어놓은 물, 그 밥물을 떠다가 설탕 조금 타 먹이고 그랬다고요. 양이 안 차니 그 불쌍한 것이 만날 울었어.”

되감아 올라가자, 그간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한(恨)도 나왔다.

“그 시절 시골에는 자갈, 모래 채취한다고 파놓은 구덩이가 있었어요. 제때 메우지 않으면 물이 들어차는데, 우리 첫째 딸이 열 살 때 거기 빠져서 먼저 갔어요. 딸 보낼 때 막내(고 민평기 상사) 임신 여덟 달 됐을 땐데, 음식이 넘어갑니까. 보고 싶어 미치겄는디.

만삭 임신부가 삐쩍 마르니 주변에서 볼 수가 없어 병원에 데려갔어요. 의사선생님이 ‘아이일랑 포기허고, 산모부터 살려야겠다’고 했어요. 절대로 안 된다고 병원서 도망쳐가지고 집에서 낳은 아이예요, 평기가. 애를 잘 못 먹이니, 보다 못해 친정에서 돼지 발목을 고아서 갖다주고 그랬어요. 그걸 먹으니 젖이 조금 나와. 그제야 방긋방긋 웃는디, 얼메나 예뻤다고요. 말도 못 해요. 아이고, 니가 스스로 살았구나, 니가 나를 살리는구나, 했지.”

가슴에 묻은 아들은 여전히 나이를 먹는다.

“그런 애가 가버린 거예요. 딸을 익사로 보내서 내가 물이라면 징그러워. 그래서 해군을 그리 반대를 했었는데…. (살아 있었으면) 올해 마흔여덟 됐겠네. 곧 있으면 평기 생일(음력 8월)잉게.”

◇ 호국영웅 초청 오찬

매년 3월과 6월 반짝 주목받지만, 이들의 삶은 이렇게 지속된다. 어제에 이어 다시 쓴 침을 삼키는 날의 연속이다. 천안함 승무원 고(故)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尹淸子·80) 여사도 그중 하나다.

충남 부여군. 시외버스터미널에서도 한참 가야 하는 한 시골마을. 오후 한때 34도까지 올랐던 7월의 어느 날, 그는 더운 줄도 모르고 살고 있었다. 단출한 단층 주택에 들어서자 “멀리서 손님이 오셨으니…”라며 에어컨을 틀어줬다. 누렇게 바랜 에어컨 앞에는 윤석열 대통령 내외가 보낸 꽃바구니가 있었다. 분홍 리본에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영웅들을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6월 9일 ‘호국영웅 20인 오찬’에 윤 여사를 초청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당시 “과거 정부처럼 정치적 환경에 따라 호국영웅들이 국가에 냉대받고 소외당하거나 평가절하되는 일이 없이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합당한 예우를 받아야 한다는 대통령의 평소 생각이 반영된 자리”라고 했다.

- 고운 한복을 입고 가셨더군요.

“그 한복이 우리 큰아들 장가갈 때 입었던 거예요. 싸구려 정장은 있는데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그래도 대통령님 만나러 가는 건데, 찍어 바르고 채리고(차리고) 갔지. 윤 대통령은 (파평 윤씨) 35대손이고 나는 36대손이라 아저씨뻘이에요.”

- 윤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호국·보훈을 강조했죠.

“대통령 되기 전부터 천안함 유족들을 만나셨어요. 지난해 11월에 모였을 때는 나는 다리가 아파 못 갔는데 그날 유족들에게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 다시 모시겠다고 했고, 이번에 그 약속을 지킨 거지요.”

- 이날 어떤 얘기가 오갔습니까.

“저는 우선 천안함 폭침 내용을 교과서에 좀 자세하게 실어달라고 했어요. 나이가 들어도 어릴 때 기억은 남는 법이거든요. 어제 일은 가물가물해도 6·25때 일은 생생하잖여. 학생 때 이런 내용을 제대로 배워야 해요.”

- 윤 대통령 반응은 어땠습니까.

“반응은 좋았어요. 저뿐만 아니라 여럿이 계시니까, 이에 대해 긴 말씀은 못 하셨어요.”

- 적극적으로 추진해보겠다라든가 그런 말은 없었나요.

“그 자리에서 확답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요. 충분히 이해해요. 잘 생각해보겠다고 하셨어요.”

◇2020년 서해수호의날 기념식장에선

일부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정권이 바뀌니 윤 여사 얼굴이 달라졌다’며 한복 차림으로 윤 대통령을 만난 사진과, 2년 전 문 대통령에게 다가갔던 사진이 나란히 올라오기도 했다.

지난 2020년 3월 27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제5회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 때 그는 분향을 하던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다가가 “천안함 폭침 사건이 누구 소행이냐”고 읍소하듯 물었다. 이에 문 대통령은 “북한 소행이라는 게 정부의 공식 입장 아닙니까.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문 대통령은 그러면서도 9분30초가량의 기념사에서 ‘북한’을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 윤 여사는 이날 기념식 직후 스트레스성 심장부종으로 병원 신세를 졌다고 했다.

지난 2020년 3월 27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서해수호의 날 기념식에서 윤청자 여사는 문재인 당시 대통령에게 ‘천안함이 누구의 소행인지’ 물었다. /사진=뉴시스
윤청자 여사는 “김정숙 여사의 눈빛을 나중에 사진으로 봤다”면서 섭섭함을 드러냈다. .사진=뉴시스

“나는 그날 대통령이 오는지도 몰랐어요. 2018년, 2019년에도 안 왔으니까요. 이때를 놓치면 기회가 없겠다 싶어서 얼른 손을 붙들고 ‘우리 아이들 누가 죽였는지 말씀 좀 해달라’고 한 거지요. ‘우리 정부에서는 인정하고 있다, 인정합니다’라고 하더군요. 좀 확실히 듣고 싶었는데….”

- 그때 찍힌 사진이 굉장히 널리 퍼졌는데, 특히 김정숙 여사의 표정에 이목이 쏠렸지요. 당시 김 여사의 시선을 느꼈습니까.

“경황이 없어 그때는 몰랐어요. 나중에 사진으로 봤지.”

- 사진으로 보니 어떤 표정으로 해석되던가요.

“쏴대는(쏘아보는) 눈치더라고. 자기가 나한테 어떻게 쏘아댈 사람이여. 위로를 해줘도 시원찮을 판에….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폭침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놈(김영철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불러다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폐막식 때) 꽃다발 주며 환영을 하고 말이어요. 그런 게 너무 싫은 거여.”

- 그 이듬해인 2021년 서해수호의 날 행사에도 문 대통령 내외가 참석했지요. 그때 김정숙 여사와 대화로 풀었다는 취지의 언론 보도가 나왔습니다. 끌어안는 모습도 보였다고요.

“나를 째려봤다는 것이 하도 여기저기서 말이 많으니까 다음 해에 되돌려보려고 한 것 같은데, 바로 밀쳐내면서 쓴소리를 했어요. 행사 전에 당시 보훈처장이 나한테 미리 부탁을 하더라고요. 이번 행사 때 김정숙 여사 옆자리에 앉으시라고. ‘내 자리가 어찌 대통령 부부 바로 옆이요? 유족회장님도 있는데’라고 했더니 좌우지간 그냥 옆자리에 앉으시라고, 그리고 김 여사가 좀 붙들고 안아주걸랑 받아주시라고. 받아주기는, 바로 밀쳐내 버렸지.”

- 어떤 쓴소리를 했습니까.

“저 멀리서 나한테 걸어오는 모습을 보니까, (보훈처장이) 간곡히 부탁을 했건, 말건 눈이 뒤집혀요, 안 뒤집혀요. 한번 올려쳐도 속이 안 풀릴 판인데, 안으려 하잖여? 대번에 밀어내면서 나는 문재인 대통령 싫다고,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고. 어제(2021년 3월 25일)도 북한이 미사일을 쐈는데 왜 숨기느냐, 왜 자꾸 북한에 벌벌 떠나, 대한민국은 누가 지키느냐고 잔소리를 마구 했어요. 감정에 받쳐서 한참 쏘아붙였는데 뭐라 했는지 다 기억도 안 나요.”

- 김 여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아이고, 그게 아닙니다, 어쩌고 했는데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천안함 없는 교과서

지난 2010년 3월 26일 일어난 천안함 폭침 사건은 미국, 캐나다, 호주, 스웨덴, 한국 5개국 전문가가 대대적으로 조사한 끝에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인한 침몰’로 결론 났다. 그런데 중·고교 역사 교과서에는 이런 내용이 제대로 나와 있지 않다. 국민의힘 의원실 등에 따르면 2020년 한국사 교과서를 새로 선정한 전국 고교 1893곳 가운데 약 70%(1310곳)의 교과서가 천안함이 북한으로부터 폭침당한 사실을 기술하지 않았다. 그중 절반 이상은 ‘천안함’이라는 단어가 아예 없고, 언급된 곳도 대부분 ‘침몰’ ‘사건’ 등으로 북한 책임을 사실상 외면했다.

윤청자 여사는 태어날 때 아들을 잘 먹이지 못한 것이 여전히 한이 된다고 했다. 사진은 지난 2010년 천안함 희생자 100일 추도식에서./사진=뉴시스

- 앞서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도 교과서 기재를 제의하신 걸로 압니다.

“하다마다요. 특히 이명박 대통령께서는 적극적으로 나섰어요. 참 애를 많이 쓰셨는데, 결국 못 했어요. 그나마 애쓴 덕에 수색 작업을 벌이다 순직한 고 한주호 준위의 희생정신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지요.”

-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왜 폭침 사실은 반영이 안 됐습니까.

“좌파, 진보학자, 전교조가 교육계를 장악하고 있으니 쉽지 않았던 거지요. 임기 마지막 해인가…. 현충원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마주쳤어요. ‘대통령님, 교과서 문제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하셨잖아요’ 했더니, 그저 고개만 끄덕끄덕 하며 지나가기에 섭섭한 마음이 있었어요. 퇴임 후 어느 날 직접 연락을 해왔습니다. 서울 삼성동에 사무실을 차렸는데, 한 번 만나고 싶다고요.” - 무슨 이야기를 나눴습니까.

“왜 그러시냐, 했더니 ‘잘 지내시나 궁금하기도 하고 못 한 이야기가 있다’고요. 빈손으로 가기 뭣하니 봄이라 쑥을 뜯어서 만든 송편을 만들어 갔더니, 소탈하게 맨손으로 집어 잡수면서 그러더라고요. ‘대통령이 되면 뭐든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죽기 살기로 반대를 하니, 어떻게 안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그때 현충원에서 고개만 끄덕였던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대요. 이렇게라도 얘기해야 마음이 풀리겠더라고, 또 놀러 오시라고요.”

- 말대로라면 앞으로도 쉽지는 않겠는데요.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안보 문제에는 여야가 있어서는 안 돼요. 특히 문재인 정부 들어 나라가 둘로 쪼개졌어요. 하나가 돼야지요. 나라를 위해 희생당한 젊은이들이 오래도록 기억돼야지요. 그래야 후손들이 안보관을 바로 세웁니다.”

- 천안함 역사교과서 문제는 항상 세월호와 비교됩니다. 세월호와 관련해서는 별도의 교재까지 출간된다고요.

“세월호 때는 저도 팽목항(현 진도항)에 찾아가서 울고 그랬어요. 자식 보낸 부모 심정을 아니까 오죽하겠나 싶어서 농사지은 녹두로 죽을 쒀서 도시락 60개를 만들어 갔었지요. 자식 보낸 어미가 더 바랄 게 뭐가 있겠냐마는, 지금 소원은 천안함을 꼭 교과서에 싣는 거예요. 나는 6·25를 겪었기 때문에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압니다. 북한 인민군이 눈앞에서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질렀어요.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돼요. 내가 배운 게 없고 무식해도 국방만큼은 튼튼히 해야 한다는 것은 알아요. 그런데 무슨 정치가 이런 정치인지, 나는 그걸 알 수가 없어요.”

◇지독한 가난에도 보상금 기탁

- 민 상사와의 마지막 대화 내용 기억하시지요.

“나하고 전화 통화하고 닷새 만에 그리됐어요. 어느 정도 진급하고, 석·박사도 따고 할 테니까 하여튼 엄니는 내 걱정 말라고. 만날 하던 소리였어요. 배를 타야 진급하고, 수당이 더 나온다, 그래야 엄니 호강시켜줄 수 있다.”

그는 “안 아픈 손가락 어디 있겠냐마는 특히 애지중지한 아들이었다”고 했다.

“내가 못 먹고 낳았는데도 머리가 좋았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1등만 했어요. 시골이라서 학원도 안 보냈는데요. 집 주변이 천지 밭이니까, 학교 갔다 오면 밥 먹이고 옥수수 따는 것 시키고 그랬다고요. 옥수수 따는 거 힘든데 괜히 시켰어요. 어느 날은 그게 후회돼서 막 울었어요. 다들 막내를 참 예뻐했지. 우리 집 양반도요. 내가 울고 있으면 ‘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면서 벌써 자기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렀어요. 그렇게 매일같이 술에 의지하더니 결국 몇 해 전 암으로 먼저 가셨어요.”

천안함 승무원 고(故)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여사/ 월간조선

- 유언을 남기셨나요.

“원체 말이 없는 양반이라,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는 말만 하더라고요. 시집와서 보니까 지독히 가난한 집이었어요. (남편이) 효자인 데다, 동네서 ‘밥 상무’로 소문나서 여기저기 퍼 주고 나면 점심 값도 안 남았어요. 그러니 내가 억척스레 일을 할 수밖에요. 아는 거라곤 농사밖에 없었으니 팔 걷어붙이고 밭만 맸어요. 내 발등 내가 찍은 거지, 누구 탓을 하겠소.”

그는 그런데도 유족보상금 중 1억원과 국민성금으로 받은 898만8000원을 방위성금으로 기탁했다. 해군은 이 성금을 포함해 5억원을 들여 K-6 기관총 18정을 구입해 ‘영주함’ 등 2함대 소속 9척에 2정씩 장착했다.

“내 품 팔아서 번 돈도 아니고 국민들이 준 건데 다시 돌려주는 게 맞지요. 그렇다고 다는 아니고 1억원 조금 넘는 돈이었지. 우리 대한민국이 젊은 아이들을 지켜줘야 하니까, 총알 하나라도 튼튼할 걸로 썼으면 싶었어요. 더 이상 이북한테 변을 당하면 안 되잖아요. 나 같은 어미가 또 안 나왔으면 좋겠어.”

- 민 상사도 이 집에서 함께 살았었나요.

“여기가 100년도 넘은 집터예요. 시집올 때는 오두막집이었어요. 옛날엔 여기서 전기도 없이 살았어요. 지금 이만하면 살 만 허지. (화장실 옆방을 가리키며) 저기가 평기 방이었어요. 아직도 잘 못 들어가.”

- 이 집에서 계속 혼자 지내시기 괜찮겠습니까.

“내가 무서울 게 어디 있어요? 호랭이가 무섭겠어요, 구신(귀신)이 무섭겠어요. 아직도 하늘에서 안 데리고 가는 걸 보면, 천안함 교과서에 실리는 것 보고 죽으라는 거 아닌가 싶어요. 지금은 죽는다고 해도, 눈은 못 감을 것 같아요.”

※ 더 자세한 내용은 월간조선 8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