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한국산 전기차 보조금 배제 문제가 한미 간 주요 외교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가운데, 최근 방한(訪韓)한 지미 굿리치(Jimmy Goodrich) 미 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은 5일 본지 인터뷰에서 “전기차와 반도체에 있어서 워싱턴(미국)이 동맹인 한국에 더 많은 유연성을 발휘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믿을만한 동맹끼리 뭉치겠다는 이른바 ‘프렌드 쇼어링(friend-shoring)’을 내세우고 있는 가운데 반도체, 전기차 등 핵심 첨단산업과 관련된 룰(rule)을 만드는 과정에서 한국 측 우려를 받아들여 유연성을 발휘해 달라는 것이다.
워싱턴DC에 소재한 반도체산업협회(SIA)는 미국 내 굴지의 반도체 기업 뿐만 아니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미국에 투자한 우리 기업을 포함한 반도체 산업의 이익 전반을 대변하고 있다. 굿리치 부회장은 한국·미국·일본·대만 간 반도체 협력체인 ‘칩4(chip four)’에 대해 “중국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과잉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또 “한미는 이미 반도체 분야에서 긴밀한 파트너”라며 “대규모 투자에 따른 미국발(發) 반도체 르네상스에 한국 기업들도 올라타길 바란다”고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한미, 이미 긴밀한 파트너… 칩4 과잉반응 필요 없어”
- 한국에서는 칩4 참여 여부를 놓고 갑론을박이 상당했다.
“미국에선 ‘칩4 동맹’이란 표현이란 말을 쓰지 않는다. 아직 공식적인 이름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동맹(alliance)이란 표현은 강하고 너무 나간 것이다. 협의도 고위급이 아니라 실무자 단계에서 이뤄질 것으로 본다. 칩4의 기본 정신은 한국·미국·일본·대만 같이 반도체 산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나라들이 정책을 조율하고 힘을 합쳐서 시너지를 발휘하자는거다. 바이든 정부는 글로벌 공급망의 회복 탄력성(resilience)을 위해서는 ‘아메리카 퍼스트’가 아니라 동맹들과 함께가야 한다고 믿고 있다.”
- 결국 중국을 배제하기 위한 것 아닌가. 한국 반도체 산업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
“반도체 소비에 있어서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이다. 기업 경쟁력을 위해서는 중국에서 영업할 수 있어야 하고, 중국과 완전히 디커플링(decoupling)하는 것은 거대한 경제적 손실을 의미한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칩4의 목표는 특정 국가(중국)를 배제하기 위함이 아니고 결코 그래서도 안된다. 투명한 의사 소통, 연구 개발, 인력 확보 같이 긍정적인 이슈들에 집중하자는거다.”
- 그런데도 미국 정부는 중국 기업을 겨냥한 반도체 수출 규제를 계속해서 내놓고 있다. 얼마 전에도 엔비디아(NVIDIA)에 대한 대중국 수출 금지를 통보했다.
“미국 정부가 첨단 기술을 통한 감시와 검열 등 국가 안보와 관련해 우려가 큰 것은 사실이다. 또 미국 뿐만 아니라 유럽, 도쿄(일본)의 정책 당국자들은 반도체 산업을 밀리면 안되는 전략적 경쟁의 주요 무대로 보고 있다. 이런 이유로 때로는 굉장히 터프(tough)한 방식으로 규제를 한다. 기업 입장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시기인데 최대한 의사소통을 해서 규제를 최소화 할 수 있도록 얘기하고 있다. 규제를 하더라도 한국 같은 키 플레이어들이 피해를 봐서 안되고, 그렇기 때문에 상호 소통하고 정책 당국자들의 의도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칩4 등 한미 간 반도체 협력이 밀착하면 중국이 반발할 가능성이 있다. 이른바 ‘사드 사태’ 때와 같은 경제 보복이 재현될 가능성은 없나.
“아직 칩4가 시작도 안해 단언하기는 이르다. 하지만 중국은 반도체 산업에 있어서 대외 의존도가 상당하고, 자신들에게 중요한 산업 관련 제재하는 것을 극도로 망설여왔다. 이 때문에 미국의 제재에 맞서 여러 수단을 구비했음에도 불구하고 한번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서방의 주요 반도체 기업을 제재할 경우 결과적으로 중국 경제만 손해를 입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또 한미는 칩4가 아니더라도 이미 긴밀한 반도체 분야 파트너다. 바이든 대통령이 평택 삼성공장을 찾았을 때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같은 장비 회사들도 함께했다. 한국은 반도체 같이 자국의 핵심 산업 경쟁력 유지를 위해선 ‘공정한 경기장(unlevel playing field)’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지 잘 알아야 한다. 조선, 디스플레이, 철강 같은 주요 산업들이 어떻게 됐는지 보라.”
◇ “반도체 르네상스 예상… 1조 달러 시장에 동맹기업 동참하길”
- 바이든 정부가 한미 간 반도체 협력을 강조하고 있고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이 대규모 대미 투자를 발표했다. 국내에선 미국으로 투자가 집중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미국에 공장 몇개 더 짓는다고 해서 반도체 산업, 특히 메모리 반도체의 중심이 한국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은 미국 반도체 산업에 있어서 매우 흥미로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역사적 수준의 투자가 반도체업의 르네상스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하고, 우리는 한국 같은 미국의 주요 파트너들이 여기에 동참하기를 바란다. 경제 성장이 지속한다면 산업 규모가 오늘 날 5600억 달러에서 2030년에는 1조 달러까지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얼마나 큰 시장인가. 특히 한국이 집중 육성하고 있는 파운드리 사업을 위해서는 미국으로 들어와 고객사들과 지리적으로 더 가까워질 필요가 있다.”
- 28 나노미터 미만 공정에 대한 중국 내 신규 투자를 금지하는 반도체 지원법의 이른바 ‘가드레일 조항’에 따른 한국 기업들의 피해가 예상된다.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이 통과하는 과정의 막판에 추가된 것이다. 민주당의 가장 왼쪽에 있는 사람들, 공화당의 가장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이 맞아 통과 시켰는데 아직 이건 진행 중인 얘기다. 한국의 피드백에 열려있다는 뜻이다. 상무부가 구체적인 기준을 정하고 있는데 우리는 더 많은 유연성을 발휘하길 기대한다. 이런 규제 때문에 삼성, SK 같은 기업들이 미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고 투자하지 못한다면 어리석은(foolish) 일이 될 것이다. 미 정부가 한국 정부, 기업과의 대화에 열려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한국산 전기차 보조금 차별 문제도 화두다.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발표했는데 한국 기업 입장에선 배신감이 들 법하다.
“전기차가 내 분야는 아니지만 반도체지원법을 둘러싼 논쟁이 있을 때도 우리는 외국의 직접투자를 허용하라고 주장하는 등 보호주의적 조치들에 맞서 과감하게 싸웠다. 전기차 문제에 있어서도 미국 정부가 한국 같은 친밀한 동맹 국가에 더 많은 유연성을 발휘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