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나 트레거브 전 우크라이나 경제개발무역부 국장이 1일 오후 서울 중구 조선일보 편집국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한국인들의 지원을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장에 있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이를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올레나 트레거브(40) 전 우크라이나 경제개발·무역부 국장은 1일 본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우리 정부가 총 1억달러(약 1406억원) 규모 기여를 약속했지만 “불행하게도 현장에서는 한국의 지원이 보이지 않는다(not visible)”는 것이다. 그는 우리 정부가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비자 면제 관련 상호주의를 적용하지 않고, 민수 물자 지원에도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해 불허한 것을 언급하며 “한국이 확실하게 우크라이나 편에 서달라”고 했다.

트레거브 전 국장은 과거 우크라이나 정부에서 일하며 100억달러가 넘는 국제 개발 프로젝트를 관리·감독했다. 이번에 한국 정부와 국회 관계자들과 만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방한했다. 최근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해 낸시 펠로시 연방 하원의장, 서맨사 파워 국제개발처(USAID) 처장 등과도 만났다고 한다. 트레거브 전 국장은 “전시(戰時) 상황이기 때문에 경험이 있는 시민사회 여성들이 ‘민간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역할 분담을 하고 있다”고 했다.

트레거브 전 국장은 “한국 정부 기여금 중 상당수가 국제적십자위원회(ICRC)로 가고 있다”며 “전쟁 발발 직후 ICRC가 직원들을 국경 밖으로 철수시켰고, 러시아 ICRC의 경우 병 징집을 위한 시스템을 제공하고 있어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적십자는 적(enemy)으로 통한다”고 했다. 그는 “한국 정부가 겨울을 맞는 우크라이나에 전기 발전기 같은 현물을 지원하는 방식이 훨씬 효과적일 것”이라고 했다. 다만 이같은 트레거브 전 국장 주장에 대해 ICRC 본부는 본지에 “모두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며 “키이우, 오데사 등 8개 지역에 700명의 직원을 두고 지원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했다. ICRC는 “대한민국 정부를 포함한 후원자들의 기여로 2월부터 우크라이나 내 활동을 대폭 확대했다”며 “절대 징병을 위한 시스템을 제공하지 않고 오로지 인도주의에 기반한다”고 했다.

우리 외교부가 러시아와는 2014년 무비자 협정을 체결해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는 반면, 한국인이 90일 무비자 방문이 가능한 우크라이나에는 상호주의를 적용하지 않고 있는 점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트레거브 전 국장은 “한국에 가려면 키이우 또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대사관을 방문해 비자 심사를 받아야 하는데 업무 시간이 제한돼 있고 한국 초청장을 요구하는 등 절차가 까다롭다”고 했다. 그는 “한국계 우크라이나인 자녀의 안전을 위해 한국으로 가고 싶었지만 좌절된 사례도 있었다”며 “EU 회원국 대부분은 2016년부터 무비자 입국을 허용해왔고 유일한 예외였던 아일랜드도 전면전 발발 직후부터 무비자 입국을 허용해왔다”고 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올해 4월 우리 국회에서 화상 연설을 하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약 15분 동안 연설에서 자국을 침공한 러시아의 무자비함과 전쟁의 참상을 전하며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연대를 호소했다. /이덕훈 기자

우리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 무기 지원 불가’ 입장을 밝힌 가운데 트레거브 전 국장은 “한국 정부가 엄격한 입장을 취하고 있어 한국 방산 회사로부터 워키토키 같은 민수 물자를 구입하는 일도 쉽지 않다. 러시아의 발전소 무차별 폭격으로 발전기 지원도 많이 필요하다”고 했다. 트레거브 전 국장은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러시아의 폭주를 막을 방법은 무력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92세나 된 우리 할머니도 ‘에이태킴스(ATACMS·전술 지대지미사일)는 언제 오냐’고 물을 정도”라고 했다.

트레거브 전 국장은 “한국은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를 수호한 경험이 있고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스스로를 ‘유럽의 한국’으로 여긴다”고 했다. 그는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를 국제사회가 돕지 않는다면 중국 같은 권위주의 국가들이 ‘침공해도 아무 일 없겠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라며 “세계 평화와 안보, 한국을 위해서라도 우크라이나 편에 서는 게 낫다. 러시아는 결코 한국을 협박할 수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