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 우리 영공(領空)을 침범한 북한 무인기 5대 가운데 1대가 용산 대통령실에서 3㎞ 거리 상공까지 침투했던 것으로 4일 확인됐다. 당초 군 당국은 북한 무인기의 용산 침투 가능성에 대해 “탐지된 것이 없다” “은평구 등 서울 북부 지역만 침범했다”면서 여러 차례 부인했다. 그러나 군과 정보 당국이 정밀 분석을 한 결과, 북 무인기가 대통령실 인근까지 정찰 활동을 하고 북한으로 돌아간 것으로 파악됐다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이종섭 국방부 장관 등 안보 라인에 이 같은 내용의 보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소식통은 이날 본지 통화에서 “북한 무인기 1대가 지난달 26일 서울 비행금지구역(P-73) 끝에 스치듯 지나간 항적을 뒤늦게 찾아냈다”면서 “약 700m가량 P-73 구역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P-73은 대통령실과 국방부 청사를 중심으로 반경 3.7㎞에 달하는 구역으로, 서울시청과 중구, 남산, 서초·동작구 일부도 포함된다.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이 무인기는 경기 김포와 파주·일산 사이의 한강 하구를 따라 저공 비행을 하며 용산 인근까지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침투가 이뤄지는 동안 북한 무인기 나머지 4대는 북방한계선(NLL) 이남의 강화도, 석모도 등 지역에서 교란 비행을 하며 우리 군 당국의 주의를 분산시켰다.
군 당국은 사태 직후 실시한 합동참모본부 전비태세검열실 조사 과정에서 이 같은 사실을 뒤늦게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안 당국 관계자는 “사태 초기 분석에서는 탐지되지 않았던 북 무인기의 항적이 교차·정밀 분석을 거친 결과 파악됐다”고 말했다. 합참은 지난달 29일 정례 브리핑에서 야당 등에서 제기된 북 무인기 P-73 침범 주장과 관련, “근거 없는 이야기에 대해 강한 유감을 표명한다”고 했었다. 군은 5일 이와 관련한 브리핑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은 4일 북한 무인기 영공 침범과 관련해 “북한이 다시 우리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을 일으키면 9·19 군사 합의 효력 정지를 검토하라”고 국가안보실에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비공개로 국가안보실과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국방과학연구소(ADD)로부터 무인기 대응 전력에 대한 보고를 받고 이같이 지시했다고 대통령실 김은혜 홍보수석이 전했다. 북한이 2018년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 때 군사 합의를 맺고도 탄도미사일이나 방사포 사격 등 10여 차례 합의를 깨는 도발을 이어오다 무인기로 영공까지 침범하자 윤 대통령이 한국군만 군사 합의를 지키는 게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남북 군사 합의가 4년 4개월 만에 사실상 폐기 수순에 들어갔다는 관측도 나온다.
윤 대통령은 이날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감시·정찰과 전자전 등 다목적 임무를 수행하는 합동 드론부대를 창설하고 탐지가 어려운 소형 드론을 연내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라”고 지시했다. 윤 대통령은 또 “연내 스텔스 무인기를 생산할 수 있도록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신속하게 드론 킬러, 드론 체계를 마련하라”고 했다.
김 수석은 “윤 대통령이 북한의 도발에 대한 비례적 수준을 넘는 압도적 대응 능력을 국군에 주문한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무인기뿐 아니라 북한의 미사일 도발을 포함해 9·19 군사 합의 위반이 일상화되는 비정상적인 나날이 지속됐다”며 “9·19 군사 합의 효력 정지(검토 지시)는 우리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행정수반이자 국군 통수권자로서의 결단”이라고 했다. 안보 당국 관계자는 “윤 대통령이 북에 ‘더는 인내하지 않겠으니 도발을 멈추라’는 최후통첩을 한 셈”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 9월 19일 채택된 남북 군사 합의는 남북이 육상과 해상, 공중에서 일체의 적대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의 군사 조치들을 대거 담았다. 그러나 합의 당시부터 군사분계선 비행금지구역 확대 등으로 한국군의 대북 정찰·감시 능력과 유사시 즉각 대응 능력 약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실제로 군사 합의 이후에도 북한은 핵·미사일 고도화를 위한 각종 활동을 이어갔다. 군 관계자는 “북한의 군사 합의 위반 사례는 총 17건”이라고 했다. 작년 10월 이후 3개월 동안에만 15차례 군사 합의를 깨며 도발했다. 문재인 정부 때도 2019년 창린도 해안포 사격, 2020년 우리 군 감시초소(GP) 총격 등 합의를 위반했고, 2020년엔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도 폭파했다.
북한이 군사 합의를 이미 깨버린 상황에서도 윤석열 정부는 합의 폐기에 신중을 기해 왔다. 그러다 북한이 작년 하반기부터 도발 수위를 높이는 등 7차 핵실험 감행 가능성이 커지자 내부적으로 ‘핵실험 시 군사 합의 폐기’ 카드를 검토해 왔다. 그런 와중에 북한이 급기야 무인기 영공 침범으로 한국군의 안보 태세를 흔들고 민심 교란까지 도모하자 강수(强手)를 꺼내 든 것이다.
군 당국은 이날 북한 무인기 대응책으로 합동드론사령부를 창설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군단·사단·대대급에 산재한 드론 무기 체계를 총괄하는 사령부급 부대를 창설해 무인기·드론 감시·식별·타격 체계를 대폭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군은 북한 소형 무인기가 2m 정도로 작아 새 떼나 풍선 등과 구별이 잘 안 되는 점을 고려해 접경 지역에 정밀 탐지 시스템도 조기에 구축할 계획이라고 했다. 군 관계자는 “‘드론건(총)’ ‘대(對)드론 타격’ 무기 등 타격 체계를 최대한 빨리 확보해 탐지 체계와 연동해 운용할 것”이라고 했다. 군은 적 레이더 탐지를 피할 수 있는 스텔스 무인기와 ‘자폭 킬러 드론’을 이르면 연내 생산할 것이라는 계획도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