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활동하는 인사나 우리 기업이 연루된 북한에 대한 불법 석유 환적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국내에서 활동하는 브로커나 기업이 러시아 국적 유조선을 섭외해 서해·남중국해상에서 중국 어선에게 유류를 넘기고, 다시 북한 어선이 이를 받아가는 식이다. 정부가 북한 핵 문제에 대응하겠다며 암호화폐·사이버 분야에서 추가 제재 발굴에 나섰지만, 우리 ‘앞마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재 위반 사례도 단속하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해경은 최근 북한에 경유를 공급한 혐의로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선족 브로커 이모 씨를 붙잡았다고 밝혔다. 이씨는 2021년 10월부터 약 3개월 동안 25차례에 걸쳐 북한에 경유 1만8000톤(약 180억원 어치)을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불법 환적은 경유를 실은 러시아 국적 유조선이 남중국해상에서 중국 선박과 만나 옮겨 싣고, 다시 북한 배에 옮겨지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중국 모바일 메신저 ‘위챗’을 통해 접선 시간과 장소를 주고 받고, 유조선에 달린 위치식별장치를 끄는 식으로 범행이 이뤄졌는데 이 과정에서 울산·경남에 있는 일부 정유 도매업체들도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최근 서해나 남중국해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법 환적 사례가 이 건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사당국은 지난해 12월 영국 왕립합동군사연구소(RUSI)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위성사진 분석 등을 통해 폭로한 서해 밀무역 건에 대해서도 들여다보고 있다. 울산에 있는 한 국내 중소 석유 수출입 업체가 빌린 러시아 선박이 서해에서 중국 선박에 유류를 넘기고, 이 선박이 토고 국적기를 달고 북한의 배타적경제수역(EEZ)로 들어갔다는 의혹이다.
국제 사회는 북한에 대한 유류 불법 환적을 엄중히 단속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는 2017년 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하자 이에 대한 여러 제재 조치를 부과했는데 결의 2375호는 북한 선박과의 해상 환적 참여와 지원을 금지하고 있고, 결의 2397호는 북한에 대한 원유(연간 400만 배럴)와 정유 제품(50만 배럴)의 공급을 제한하고 있다. 원유나 정유 제품을 공급할 땐 유엔의 대북제재위원회에 관련 내용을 통보해야 하는 의무도 부과된다. 우리 국민이나 기업이 연루된 제재 위반 사례가 잇따를 경우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국제 사회에 대북 제재 이행과 준수를 강조할 명분도 약해지게 된다.
제재 전문가인 고명현 아산정책연구원 선연구위원은 31일 FT에 “불법 환적이 박살난(shattered) 북한 경제는 물론 평양의 무기 개발 프로그램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며 “(이번 사례는) 많든 적든 한국의 당국자들이 불법 환적 사례를 찾아내 강하게 단속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외교부는 1일 “해경이 공개한 사안은 우리 국내법 위반 외에도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위반에 해당되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해경청 등 관계부처와 긴밀히 소통하고 있으며 대북 제재 결의 이행 관련 조치를 취해 나갈 예정”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