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1일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과거의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로 변했다”면서 양국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이날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104주년 3·1절 기념식 기념사에서 “복합 위기와 심각한 북핵 위협 등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한·미·일 3자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윤 대통령은 “우리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하고 협력해서 우리와 세계 시민의 자유 확대와 공동 번영에 책임 있는 기여를 해야 한다”면서 “이것은 104년 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외친 선열들의 정신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했다. 현직 대통령이 취임 후 첫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을 향해 ‘협력 파트너’란 표현을 쓴 것은 처음이다. 한일 양국이 과거사를 잊지 않되 강제징용 문제 등으로 가로막힌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 양측 모두 성의 있는 조치에 나서야 한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풀이된다.
윤 대통령은 이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온 순국선열들과 애국지사들께 경의를 표한다”며 “3·1 만세운동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104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며 “변화하는 세계사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불행이 반복되게 될 것은 자명하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영광의 역사든, 부끄럽고 슬픈 역사든 잊지 말아야 한다”면서 “헌신한 선열들을 기억하고 우리 역사의 불행한 과거를 되새기는 한편, 미래 번영을 위해 할 일을 생각해야 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라고도 했다.
윤 대통령은 이날 취임 후 첫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을 ‘협력 파트너’로 규정하며 자유·평화·번영·미래를 향한 한일 관계 정상화를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약 1300자 분량의 기념사에서 독립(10회), 자유(8회), 조국(7회), 번영·위기(각 4회), 안보·변화·협력(각 3회) 등을 언급했다. ‘과거’를 4번 언급했지만 ‘미래’는 5번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특히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같은 과거사 현안이나 일본의 사죄나 반성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8년 첫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을 향해 ‘가해자’ ‘반인륜적 인권 범죄’ 같은 표현을 쓰며 반성을 촉구했던 것과는 대비된다. 양국이 과거사를 직시하되 미래를 내다보고 관계 개선에 돌파구를 열어야 한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양국 외교 당국 간에 진행 중인 강제징용 협상을 염두에 뒀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작년 8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 때 강제징용 배상 문제 해법과 관련해 “대법원 판결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일본이 우려하는 주권 문제의 충돌 없이 채권자들이 보상받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중”이라고 했었다. 윤 대통령은 작년 9월엔 미국 뉴욕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고 징용 배상 문제 해결을 위한 외교 당국 간 대화에 속도를 내기로 합의했다. 이후 일본 정부와 교섭을 이어온 한국 정부는 지난 1월 ‘제삼자 대위 변제’ 방안을 공식화했다. 한국 대법원의 배상 판결을 받은 징용 피해자들이 받을 배상금을 우리 정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먼저 지원할 수 있게 하는 중재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국 외교 당국 협상이 막판에 이르렀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일본 외무성에서 협상 실무를 담당하는 후나코시 다케히로 아시아대양주 국장이 지난 주말 비공개 방한한 사실이 알려졌고, 박진 외교부 장관도 최근 주요 20국(G20) 외교장관 회의 출장을 취소하고 전날 징용 피해자 유족 측과 처음으로 면담했다. 외교 소식통은 “윤 대통령은 한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조치를 하고, 일본도 그에 맞춰 성의 있는 조치에 나서기를 기대하고 있다”면서 “그렇다고 일본의 사죄와 반성을 요구하는 데 매몰돼 협상의 물꼬를 트지 못하는 상황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이라고 전했다.
이런 맥락에서 윤 대통령의 3월 말 조기 방일을 통한 한일 정상회담 성사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윤 대통령의 관계 정상화 의지를 감안할 때 양국 간 협상에 급진전이 이뤄질 수 있고, 그럴 경우 오는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주요 7국(G7) 정상회의 이전에 윤 대통령 방일이 성사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상황을 좀 더 지켜보자”라고 했다. 다만 윤 대통령 조기 방일은 일본이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사과와 일본 관련 기업의 기부 참여 문제에 대해 진전된 입장을 내지 않는 상황에서 일각의 희망적 사고를 반영한 것이란 분석도 있다.
이날 기념식에는 애국지사, 독립유공자와 유족, 여야 지도부, 주한외교단 등 1300여 명이 참석해 3년 만에 대규모로 행사가 개최됐다. 윤 대통령과 함께 김건희 여사도 참석했다.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이 개식 선언을 했다. 안중근 의사를 다룬 영화 ‘영웅’의 윤제균 감독과 주연배우 정성화씨 등이 독립선언서 영상 낭독에 참여했다. 윤 대통령은 행사가 끝나고 퇴장하면서 정진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과 인사하고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도 악수했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악수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대면한 것은 작년 10월 충남 계룡대에서 열린 국군의 날 기념식 이후 처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