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징용 피해자 유족들은 14일 본지 인터뷰에서 정부가 발표한 ‘제3자 변제’ 방안에 대해 “일본의 만행을 용서하기 힘들지만 우리 세대에서 매듭을 짓고 다음 장으로 넘어갈 때라고 생각한다”며 “정부 해법에 찬성하고, 미래를 말한 윤석열 대통령의 뜻에도 공감한다”고 했다. 정부 발표 이후 피해자 측이 공개적으로 찬성 목소리를 낸 것은 처음이다.
이날 인터뷰에는 미쓰비시중공업(히로시마) 강제징용 피해자인 고(故) 정상화씨의 아들 정사형(65)씨와 익명을 요청한 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나고야) 피해자 유족 등 3명이 참여했다. 2018년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은 징용 피해자는 모두 15명(총 3건)이다. 이들 중 12명은 고인이 됐고 양금덕씨 등 생존자 3명은 13일 정부 해법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유족들은 “한국과 일본은 서로 도망갈 수 없는 이웃 국가이자 순망치한(脣亡齒寒) 같은 관계”라며 “이제 한일 국민들이 과거는 뒤로하고 서로 화합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됐다”며 “지금 중요한 건 극일(克日)이지 반일(反日)은 아니다”라고도 했다. 다만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를 향해선 “이번 주(16~17일) 한일 회담에서 징용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줄 수 있는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유족들은 정부 방안을 비난하며 ‘친일(親日)’ 공세를 펴고 있는 야당과 일부 시민단체들을 향해서도 쓴소리를 했다. 정사형씨는 “90년대 말 일본에서 미쓰비시를 상대로 외로운 싸움을 할 땐 아무 관심이 없더니, 이 문제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갑자기 시류에 편승해 반일을 외치고 있다”며 “이번에 해결하지 못하면 30년 이상 기다린 피해자와 유족들을 또다시 희망고문 하는 것이 된다”고 했다.
이들은 길게는 30년 이상 끌어온 재판과 배상을 둘러싼 한일 갈등에 피로감을 호소하며 조속한 해결을 요구했다. 정사형씨의 부친은 일제강점기인 1944년 히로시마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조선소에 있었다. 정씨 부자는 1990년대 말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지만 3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이후 2000년 5월 한국으로 사건을 가져와 부산지법에 소송을 냈는데, 부친은 2011년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 세상을 떴다. 정씨는 “이제 와서 서로 좋은 모습으로 마무리하려는데 또다시 좌절된다면 기대하는 분들의 마음에 칼질하는 것이 된다”고 했다.
유족 A씨는 “징용 피해자들이 귀국한 지 100년이 다 돼가는데 언제까지 과거에만 얽매여 있을 수는 없다”고 했다. 그는 “고인도 ‘(징용 피해자인) 우리만 사는 대한민국이 아니다’라며 한일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원치 않으셨다”며 “대통령부터 나서서 100년 가까이 된 한을 풀어주겠다는데 적극 지지한다”고 했다. 또 다른 유족 B씨는 “2세 입장에서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정부가 올바른 방향을 설정한 것으로 본다”며 “말년에 재판 하나만 바라봤던 고인은 이 문제를 빨리 종결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고 했다. 이어 “반대 의견도 존중하지만 생존자들도 나이가 100세에 가까운데 이번에 해결 못 하면 배상도, 사죄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며 “이게 과연 그분들이 원하는 대답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A씨는 16일 예정된 한일 정상회담과 관련해 “일본이 피해자들에게 위로나 사죄의 한마디라도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한일 청구권 수혜 기업의 기부를 통한 배상금 재원 조성에 나선 상황에서 미쓰비시, 일본제철 등 일본 피고 기업들도 여기에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현재 우리 정부는 일본 측에 ‘성의 있는 호응’을 요구하고 있지만 일본 정부는 제3자 변제 절차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에야 피고 기업들이 징용 재단에 간접적 방식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들은 “이 문제는 정치 이슈로 만들어 쟁점화할 것이 아니다”라며 “이해관계, 이념에 따라 움직이는 분들은 제발 손을 떼고 당사자들이 차분하게 결정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다. 정씨는 “일본에서 재판할 당시 현지 일본 변호사, 사회운동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그분들은 항상 무릎을 꿇은 채로 부친을 대했고 ‘잘못된 과거의 일 때문에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고 했다. 그는 “당시 한국에선 모두가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며 냉랭했다”며 “지금 (반일)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는 정치인들 중 그때 힘을 보태준 사람이 있느냐”고 했다. 이어 “소송의 역사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모든 걸 다 아는 듯 얘기하는 상황이 불편하다”고 했다. 정씨는 “부친이 생전에 ‘일본에 배상받기 어려울 것이고 기대하지 말라’ ‘내가 이렇게 움직였다는 것만 기억해 달라’고 강조했다”고도 전했다. 돈 때문에 오랜 소송전을 벌인 게 아니라는 취지다.
정씨는 “이 문제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마무리 지었어야 하는 문제”라며 “나는 보수가 아니고 이념도 없지만 재임 기간 (징용 배상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했다. 2012년 징용 개인 배상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에 대해선 “김능환 대법관이 ‘건국하는 심정’이라며 기존 판결을 뒤집어 수혜를 받게 된 사람 입장에선 고맙지만 잘못된 판결이었다는 게 솔직한 내 소신”이라고 했다. A씨는 문재인 정부 시절 이른바 ‘노 재팬(NO JAPAN)’ 운동에 대해 “조국 전 장관이 죽창가를 불렀을 때 분노했다”고 했다. B씨도 “한일이 서로 경제적 손해만 봤고 문제가 실질적으로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다”며 “자꾸 뭐든 풀어가야지 몽니만 부린다고 될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특히 일부 시민단체를 향해선 “아무런 대안 없이 반대만 하고 있는데 반일 정서를 자극하면 동조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피해자) 자식들 입장에선 그렇지 않다. 이 문제를 언제까지 끌고 가야 하는가”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