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6일 도쿄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일본의 대한(對韓) 반도체 부품 수출 규제 해제 등에 합의하고 양국 외교·경제 당국 간 전략 대화 등을 복원하기로 한 것은 2018년 한국 대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 이후 촉발된 경제·안보 갈등을 풀면서 관계 정상화를 본격화하기로 한 것이다. 양국은 또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맞서 안보 협력도 강화하기로 했다. 글로벌 경제 위기와 북한 핵·미사일 위협에 노출된 두 나라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쟁점을 넘어 경제·안보 분야에서 진전을 이뤄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두 정상은 이날 12년간 중단됐던 정상 간 셔틀 외교도 복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날 회담 공개 발언이나 공동 기자회견에서 일제 징용 문제에 대한 기시다 총리의 직접적인 입장 표명은 나오지 않았다. 기시다 총리는 이날 과거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문서화한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지만, 과거사 문제에 대해 ‘성의 있는 호응’을 요구해 온 한국 내 여론을 감안하면 일단 ‘봉합’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징용 등 과거사 문제는 불씨 남아
이번 한일 정상회담은 한국 정부가 지난 6일 일본 피고 기업을 대신해 한국 정부 산하 재단이 징용 피해자들에게 판결금을 대신 지급하는 해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이뤄졌다. 윤 대통령은 이날도 한국 재단이 대신 변제하더라도 일본 피고 기업에 대한 “구상권 행사는 상정하고 있지 않다”고 거듭 밝혔다. 윤 대통령은 “만약 구상권이 행사된다고 하면 다시 모든 문제를 원위치로 돌려놓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이런 입장에 대해 한국 내 일각에서 반발 여론도 만만치 않다. 이 때문에 이번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총리가 징용 등 과거사 문제에 대해 진전된 입장을 내놓을지에 관심이 쏠렸지만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입장은 나오지 않았다.
기시다 총리는 한국의 징용 해법 발표를 거론하면서 “일본 정부는 1998년 10월에 발표한 한일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했다. 윤 대통령도 “올해는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이 25주년 되는 해”라며 “이번 회담은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정신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양국 간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한일 간 협력의 새 시대’를 여는 첫걸음이 됐다”고 했다.
그런데 기시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일본 측 호응 조치가 부족하다는 한국 내 여론이 많다’는 한국 기자 질문에 “한국 정부의 조치를 2018년 대법원 판결로 어려운 상황에 있었던 한일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기 위한 것으로 평가한다”고만 말했다. 오히려 일본 교도통신은 기시다 총리가 이날 윤 대통령에게 박근혜 정부 시절 양국이 맺은 위안부 합의 이행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는 기자들과 만나 “오늘 정상회담에선 주로 미래지향적으로 한일 관계를 발전시킬 방법과 방향 위주로 논의됐다”고만 답했다. 일본이 한국 정부의 징용 해법 발표를 계기로 문재인 정부 때 사실상 파기된 위안부 합의 이행까지 요구하고 나온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윤 대통령은 과거사를 직시하되 한일 간 쟁점 상당수를 일괄 타결식으로 해결하고 양국 간 협력의 동력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과거사와 관련한 일본 정부의 직접 사과는 과거 일왕과 총리를 포함해서 50여 차례 있었고, 기시다 총리도 이를 계승한다고 했다”면서 “우리가 한일 관계의 미래와 미래 세대를 위해서 새로운 역사적 창을 열었다는 측면에서 윤 대통령이 새로운 문법을 적용하고 있다”고 했다. 외교 소식통은 “차이점보다 공동 이익에 초점을 둔 구동존이(求同存異) 자세로 해법을 모색하자는 뜻”이라고 했다.
◇셔틀 외교 재개하고 경제 안보 대화 출범
두 정상은 이날 “양국 관계에 관해서는 광범위한 관계에서 정부 간 소통을 활성화하는 데 일치했다”면서 2011년 이후 중단됐던 양국 정상 간 상호 방문 외교를 재개하기로 합의했다. 이번 윤 대통령 방일이 셔틀 외교 재개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두 정상은 앞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 차원의 한일 경제 안보 대화 출범을 포함해 다양한 협의체도 가동하기로 했다. 윤 대통령은 “양국의 풍요로운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경제 안보와 첨단 과학뿐 아니라 금융·외환 분야에서도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해 나가기로 했다”고 했다. 기시다 총리는 “각 정책 분야에서 담당 부처 간의 대화를 폭넓게 추진해 나가겠다”고 했다.
◇”지소미아 완전 정상화” 등 안보 협력 강화
두 정상은 이날 장기간 중단됐던 외교·국방 당국의 국장급 안보정책협의회와 외교 차관급 전략 대화를 조기에 재개하는 데 합의하는 등 양국 안보 협력을 강화하자는 데도 뜻을 같이했다. 윤 대통령은 특히 정상회담에서 징용 문제가 불거진 이후 조건부 연장 상태에 있는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의 완전 정상화를 선언했다.
윤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장거리탄도미사일 발사를 거론하며 “저와 기시다 총리는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한반도와 동북아,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날로 고도화되고 있는 북핵,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한·미·일, 한일 공조가 매우 중요하며, 앞으로도 적극 협력해 나가자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고 했다.
기시다 총리도 “핵·미사일 활동을 더욱더 추진하는 북한에 대해서는 미·일 동맹, 한미 동맹의 억지력과 대처력을 한층 강화하고, 한일 그리고 한·미·일 3국 사이에서도 안보 협력을 강력히 추진하는 것의 중요성을 확인했다”고 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
1998년 10월 8일 도쿄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채택한 선언. 정식 명칭은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다. 이 선언에서 오부치 총리는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줬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인다”면서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를 했다”고 했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죄가 공식 합의 문서에 명시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